제목 | 눈 뜬 장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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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1-11-19 | 조회수1,80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연중 제 33주간 월요일 말씀(독서 1마카 1,10-64; 루가 18,35-43)
독서의 말씀은 기원전 168년경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치하에서 유다인들이 당한 최고의 박해상황을 그리고 있다.
안티오쿠스 4세인 그는 자칭 신이 발현(에피파네스)했다고 하며 자신을 신으로 떠받들 것을 종용하여 속국들의 종교를 탄압하고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폈다.
그중에서도 유다인들은 역사상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니 그들의 종교에 대한 신앙심은 타 민족에게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 번제 제단 위에 제우스의 상을 세워놓고 제물을 받치게 하였으며, 안식일도 준수하지 못하고, 부정한 음식으로 취급되었던 돼지고기를 먹이고,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불에 태워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을 충실히 지키려는 백성들은 너나 없이 이러한 황제의 명령에 불복하여 목숨을 버리는 피의 살육이 재현되었었다.
이런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는 반역의 무리들이 들끓기 마련이었다. 할례의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파기하고 이방인들의 풍속을 따라 자신과 후손의 안녕을 기약하는 사람들도 생겼던 것이다.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을 버리고 산으로 사막으로 숨어들어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사람들이 마카베오 형제들을 주축으로 궐기한 민족 투사들이었고 이들의 신앙의 항전기록이 마카베오 상, 하 권이다. 그리고 이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들만 알아 들을 수 있는 표상과 암호, 숫자들로 씌어진 묵시문학이 출현하는데 성서 안에는 다니엘 서가 그것이다.
연중기간이 끝나가고 새로운 전례의 새해를 기다리고 있는 시점에, 대박해기간 중의 영웅적 투쟁을 그린 마카베오 서와 다니엘 서가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뜻이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복음도 공관복음의 소 묵시록들이나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닥치기 직전의 마지막 부분들이 선포된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종말이나 죽음에 대해 묵상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생을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려는 뜻일 것이다.
지난 월요일 새벽 한 시경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한 해 동안 시름시름 앓기는 하셨어도 그렇게 속절없이 돌아가시게 될 줄은 몰랐다. 마지막 날, 혼자서 용변을 보실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긴 했어도 식사는 많이 하셨기에 아버님이나 식구들이나 오랜 동안 고생하리라 생각했었다. 당장 내일부터의 상황이 차마 가늠해보기도 힘들어 친구들에게 메일로 넉두리를 보내고 나서 잠이 들었는데 채 한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으니...
인생이 무상하고 허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 치 앞도 예측을 할 수 없는 우리의 몰골이야말로 눈뜬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렇게나 빨리 가실 줄 알았더라면 좀더 잘 보살펴드리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아버님을 떠맡고 싶지 않아 마음 고생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병에서 겨우 살려놓으시더니 이런 십자가를 또 맡으라는 거냐고 울고 불고 하지는 않아도 되었을텐데....
기간이나 정도를 예측할 수 있는 고통은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내일을 모르기에 우리는 모두 복음의 "예리고 소경"보다 더 중증 소경이다. 아니, 복음 안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서 그 소경만이 "다윗의 자손"을 알아보고 있고 그분이 눈을 뜨게 할 능력이 있음을 알았으니 이런 의미에서 그는 유일한 정상인인 것이다.
하필이면 예리고에서 예수의 정체를 알아 보는 맹인 한 사람, 예루살렘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예리고라는 장소의 중요성은 곧 예루살렘에서 치루어야 할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형을 앞에 둔 시점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자비를 구한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고 물으신다. 눈을 뜨게 해달라는 희망을 들어주시면서 그를 살려주신다. 그가 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생명(영원한)을 얻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라면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 앞에서, 어떤 고초와 수모를 겪던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로 알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안에서 희망과 생명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시련과 고통 안에서도, 기나긴 절망과 암흑의 세월 속에서도 주님께만 신뢰할 수 있다면 비록 육신의 눈이 감겨있다 하더라도 누구보다도 밝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리라.
수난의 예루살렘으로는 뒤따르지 않으려고 버틸 때까지 버티는 눈뜬 장님의 신세로 되풀이 되풀이 돌아가는 나는, 오늘 다시 주님께 간청해보아야겠다.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어두움을 버리고 광명천지에서, 생명의 세계에서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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