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역구를 바꾸셔야만 승산이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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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1-11-24 | 조회수1,826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11월 25일 일요일 연중 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루가 23장 35절-43절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하며 조롱하였다.
<고통과 슬픔의 왕>
세상을 살아 가다보면 인간관계 안에서 실망을 느낄 때가 자주 생깁니다. 가장 실망의 강도가 크게 다가오는 순간은 아마도 상대방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의심한다든지 오해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동안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느끼셨던 비애 중에 가장 큰 비애 역시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더 가슴아팠던 일은 예수님께서 여러차례 특별교육을 시키셨던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마저도 끝까지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몰이해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주변사람들과 군중들을 향해 자신의 정체와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운명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은 정치가가 아니라고 명백히 밝히십니다. 자신은 세상의 정치인들이 하는 것처럼 군중들을 등에 엎고 폭력을 행사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왕이 결코 아님을 누차에 걸쳐 선포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앉히려고 갖은 수단을 다 씁니다. 특히 예수님을 등에 엎고 한 가닥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선생님! 이제 곧 초막절입니다. 좀 열심한 유다인이라면 거의 다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를 떠납니다. 여기 갈릴래아 촌구석에서는 아무리 날고 뛰어보아야 별 볼일 없습니다. 지역구를 바꾸셔야만 합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만 합니다. 거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셔서 선생님의 확고한 이미지를 심어 놓아야만 더 많은 유권자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사명은 결코 이게 아닌데,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자신을 몰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유다 백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다인의 왕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격하시켰습니다.
오늘 십자가에서 매달리셔서 군사들로부터 조롱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그분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축복과 안녕이 보장된 세속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백성들로부터 갈채를 받은 왕이 아니셨습니다. 어디가나 백성들로부터 인정받고 환영받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어디가나 가장 좋은 자리에 앉는 넘버원의 인물이 아니셨습니다.
그보다는 그 쓰디쓴 고난의 잔을 받아 마셔야 했던 인내의 왕이셨습니다. 냄새나는 죄인들이 발을 씻어주셨던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그 처참했던 형극의 십자가길을 묵묵히 걸으셨던 고통의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해 묵묵히 죽어 가신 어린양과 같은 왕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엇을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소원성취입니까? 건강입니까? 혹 끝없는 부귀영화입니까?
오늘 다시 한번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신앙,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더욱 기뻐하고 감사하는 역설의 신비를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가장 훌륭한 묵상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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