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0만원짜리 수표 한장과 200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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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1-11-25 | 조회수2,126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11월 26일 월요일-루가 21장 1-4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요구가 많으신 예수님>
예수님 시대 유다 성전에서의 예물 봉헌 방식은 헌금을 조금 밖에 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창피 당하기 딱 좋은 방식이었습니다. 성전 금고 맞은 편의 뜰에는 나팔 모양으로 된 열세개의 헌금궤가 놓여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에다 헌금을 했습니다.
헌금궤 앞에는 그날의 헌금 당번 사제가 앉아있었는데, 헌금하는 사람들은 그 사제에게 헌금의 액수가 얼마인지? 그리고 헌금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보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돈의 액수를 확인한 사제는 사람들에게 어느 헌금궤에 돈을 넣어야 하는지를 안내해주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남편이 없어서 법정에 서지 못하는 과부들에게 법적인 도움을 주곤 했었는데, 그 보답으로 두둑한 사례금을 챙기곤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백성들로부터 많은 돈을 강탈해 지갑을 두툼하게 채운 고위층들이 헌금궤 앞에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헌금궤 맞은 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의식해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의 한마디 칭찬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한 가난한 과부가 헌금궤 앞에 섰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어렵게 어렵게 삶을 연명해가던 과부였습니다. 생활고와 세파에 찌든 그녀의 행색은 말할 수 없이 초라했습니다. 더욱이 방금 부자들이 많은 돈을 헌금하고 난 후라 완전히 주눅이 든 상태에서 담당 사제 앞으로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웠던 일은 그나마 번 돈들을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하다보니 거의 헌금함에 넣을 돈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헌금을 하지 말까?" 하고 망설이던 과부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호주머니에 남아있던 돈을 전부 꺼내 헌금 담당 사제에게 건냈습니다. 그 액수는 200원이었습니다. 좀 전에 헌금했던 율법학자로부터 10만원권 수표를 건네 받았던 사제는 1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건네는 과부의 모습에 너무도 어이가 없어 크게 웃음을 터트립니다.
"200원이라! 야! 이거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군! 200원이라면 마을 버스도 한번 탈 수 없는 돈이 아닌가?" 뭐라고 한소리 하려다가 한껏 인내심을 발휘한 사제는 크게 선심 쓰듯이 과부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계속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 저기 제일 끝 헌금궤에 갖다 넣고 나가시오!"
이런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시던 예수님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동전 두 개를 넣은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과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헌금함에 넣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삶 전체, 생명 전체를 봉헌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를 향한 요구도 많으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전적인 봉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자세를 싫어하십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앙생활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전적인 투신을 하지 않는 이상 자기이탈이나 해방감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전적인 의탁입니다.
"우리가 크게 포기하면 할수록 크게 얻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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