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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완행 열차를 타고 오시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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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2-02-05 조회수2,353 추천수10 반대(0) 신고

성녀 아가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말씀(마르 5,21-43)

 

때때로 성서 속에서 복음사가의 문학적 재치에 감탄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성서를 읽다 발견하게 되는 또 하나의 부수적인 기쁨이다. 오늘 복음도 그런 경우이다.

 

복음사가가 하혈병 여자의 치유와 야이로 회당장의 딸의 소생 기적을 따로 따로 전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한 대목으로 연결해서 들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참고로 마르꼬 복음사가는 이처럼 한 가지의 사건 안에 다른 이야기를 끼어 넣는 샌드위치式 문학기법을 잘 쓰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분명 있을 터이다.  만일 두 가지의 이야기가 각각 분리되어 이어졌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 같은 내용을 전해주는 마태오 복음(9,18-26)에서는 애초에 회당장의 딸이 죽어서 처음부터 <치유>가 아닌 <소생>을 부탁하고 있다. 그러니 가는 도중에 하혈병 여자가 끼어 들어도 회당장에게는 별 피해가 없다.

 

그러나 마르꼬복음은 다르다. 회당장의 딸이 위급한 지경인데 엉뚱한 다른 여자가 끼어 들어와 시간을 뺏는 바람에 결국 죽고 말았다. 정말 마르꼬 복음은 마태오 복음보다 엄청나게 시간을 질질 끌고 있다. (9절과 23절의 분량의 차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긴장감, 박진감이 더 하다. 그러나 그보다 복음사가는 이런 문학적 기법을 통해서 신앙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회장장 딸이 죽자 사람들의 반응이 재빨리 달라진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중하게 체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 속에서 시간을 지체한 은근한 원망이 내비치는 듯하다.

 

우리는 하루하루 복음을 떼어서 읽어 그렇지, 마르꼬 복음을 한번에 주욱 읽고 있는 독자라면 그동안 예수의 ’치유의 기적’, ’구마의 기적’은 많이 보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는 것은 처음 만나는 대목일 것이다. 독자들은 당연히 "그런 것도 가능할까?" 의심을 품을 만한 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결국 체념과 포기, 은근히 원망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바로 독자들의 마음도 대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은체도 아니하시고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신다.

 

예수께서 이미 곡(哭)을 하는 초상집에 들어가셔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일어나라)!" 하시자 소녀는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믿어지지 않아 어리벙벙한 사람들 앞을 걸어 다니는 소녀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유령이 아님을 증명해야만 할 정도였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예수는 죽은 이도 살려낼 수 있는 분’이심을 처음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은 바로 ’하느님의 능력’이다.

 

회당을 맡고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엎드려 간청을 할 때에야 예수께 대해 어느정도의 믿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 때문에 그의 청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회당장은 신앙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집안 사람들의 권유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던지 걱정 말라는 예수의 말을 들을 것인 지의 기로에 서있던 회당장!

 

처음 예수께 품은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아니 이게 진짜 믿음일는지도 모른다. 아까는 ’용한 의사’로서의 예수의 ’인간적인 능력’을 믿었을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예수안에서 ’하느님의 능력’를 믿어야 하는 판이니 말이다.

 

우리는 늘 다급해서 주님께 청을 드리게 되지만 어쩐 일인지 주님은 즉각 우리의 일을 해결해 주시지 않는 때가 더 많다. 우리는 주님이 급행 열차를 타고 오시길 바라는데 주님은 늘 완행 열차를 타고 오시는 것같다.

 

혹시 그 낡고 냄새나는 비좁은 곳에서 주님을 애타게 만져 보려는 애처로운 하혈병자들에게 둘러싸여 오시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체되니 다 틀렸다고 포기해 버릴까? 아니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할까?

 

초고속 ADSL을 깔아놓고도 답답해하는 조급한 우리 세대에게는 주님의 능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늦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더 힘겨운 시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늦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조급함에 길들여진 우리 마음으로 인해 무지하게 늦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회당장보다 <더 더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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