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두번 땅바닥에 글을 쓰셨던 까닭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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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3-18 | 조회수2,235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사순 제 5주일 월요일 말씀(요한 8,1-11)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와서 예수님과 만나게 된 여자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살벌하고 급박한 현장에서 무슨 일로 두 번씩이나 땅바닥에 글씨를 쓰셨으며 그러고 나서 사태가 역전되어 버렸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반성을 시키기 위한 시간을 주려는 침묵 즉 예수님의 고도의 심리적인 기법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땅바닥 가득히 둘러선 사람들의 죄상을 일일이 적고 있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상상은 상상을 낳아서..어떤 이는 둘러 선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던 불륜의 상대자들의 이름을 땅바닥에 쓰셨더니 그것 때문에 자신들의 행실이 들통날까봐 기겁을 해서 자리를 떠났다는 농담마저 만들어냈습니다. ^^
이보다 성서적으로 보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17, 13의 말씀을 기초로 땅바닥에 쓰인 글씨는 결국은 지워지고 마는 것처럼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맥락과 연결하여 ’주님은 우리의 죄를 잊어주고 과거를 묻지 않는 분이다’는 의미라는 해석입니다. 모두 재미있고 일리있는 해석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율법을 등에 업고 자신만만하게 의인임을 자처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있었고, 현장에서 들킨 명백한 죄인(간음한 여자)도 있었고, 호기심에 찬 군중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옆의 사람과는 다르다며 구분을 짓고 우열을 가리고 싶어 안달을 하지만 주님의 입장에서 보니 모두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같은 사람인데 달라 보이는 이유는, 현장에서 들킨 것과 들키지 않은 것, 눈에 띠는 잘못과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잘못,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제일 작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 돌로 치라" 하시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하셨습니다. 그러니 돌로 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돌로 치던지 용서를 하던지 그 판단은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의 저울은 늘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비정한 불량저울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의 의도대로 이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비쳐볼 수 있는 거울로 <사용하고는> 모두 물러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과연 주님은 만족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말씀의 거울로 비추어보고 알아보라는 심리학적, 정신분석적 단계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하시고 다시 바닥에 쭈구리고 앉아 글을 쓰시는 그분의 두번째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주님의 이 두번째 행위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없는 듯합니다.)
만일 주님의 의도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할 시간을 주시려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기억해내고는 양심에 찌려 모두 당신을 떠나길 원하실까요?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음한 여인처럼 당신과 머물 생각을 하길 원하실까요? 답은 자명합니다.
마지막 홀로 남은 여인은 예수님과 개별적인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죄의 경중을 떠나 모두 같은 죄인임을 느꼈고 그분이야말로 자신들의 죄를 씻어 줄 분이심을 참으로 믿었다면 이런 깊은 만남과 대화에 모두 참여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성서 속에서 그분과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를(또는 나의 죄상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 꼴이 그러니 내 이웃에게 돌팔매를 던질 수 없다는 것으로만 끝나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죄를 가르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단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상태를 벗고 나날이 새롭게 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간음한 여인처럼 그분과 함께 머물며 개인적이며 친밀한 만남을 가짐으로써 새로운 삶으로 파견받아 자신의 삶을 기쁘고 신나게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분의 진정한 목적이며 기쁨일 것입니다.
사순시기... 우리의 죄스러운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 알아내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기에 그분 안에서 죄로 얼룩진 나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아니 참다운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까지...주님 앞에 머물러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활하는 그 때까지...
주님, 어제의 저의 모습 때문에 끊임없이 실망에 빠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앞에 끝까지 남아 다시 깨끗해지고 싶습니다. 주님, 다시 씻겨주시고 다시 파견해주십시오. 늘 새롭게 주님을 만나고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변신하여 온 천지를 새롭게 맞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오늘 당장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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