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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억울한 유다, 억울한 파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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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2-03-28 조회수2,044 추천수8 반대(0) 신고

어제와 오늘은 예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요한복음의 장면과 마태오복음의 장면이 연달아 이어졌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유다의 배반이 마치 예정되어 있는 수순을 밟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구절들이다. 더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적셔주시는 빵을 먹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하고 이어  예수께서는 배신을 재촉하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다는 정해져있는 운명에 따라 자기의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역사에 길이 단죄가 되고 있다는 억울함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이와 비슷한 문제가 출애굽 직전의 파라오의 완고한 고집에 대한 문제이다. 열가지 재앙을 초래하게 한 파라오의 완고한 마음은 사실 하느님이 그렇게 하신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인간에게 악의를 품게 하고 주도하시는 분이신가? 그러고도 그 책임과 결과를 인간에게 떠미는 분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질문을 언제나 받아왔기에 이 자리를 빌어 생각해보려고 한다.

 

’네 복음서 대조’라는 책은 한번에 네 복음서의 각 특색을 살펴보기 좋게 되어있다. 먼저 공관 복음서들(마태오, 마르꼬, 루가)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넘겨줄 것이라는 것을 <담담히> 예고하신다.

 

"나와 함께 손을 대접에 담근 그 사람",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 "나를 넘겨 줄 사람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습니다."  빵이나 야채를 쏘스에 찍어먹는 식습관을 언급하면서, 한 그릇에 담긴 쏘스를 찍어먹을 정도로 친밀한 사람들, 바로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배반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담담했으나 제자들은 몹시 근심스러워 하며 배신자가 자신이 아님을 저마다 확인받고자 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은 분명히 성서에 기록된 대로 될 것(=하느님의 계획이라는 말)이라고 천명하신다. <그러나> 배반자의 불행한 운명에 대해서는 회한의 말씀을 남기신다. 즉 배반자의 운명은 분명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마태오복음에서만 유일하게 "저는 아니겠지요? 랍비?" 하고 유다가 묻지만 예수께서는 알듯 모를듯한 대답, "네가 말했구나.(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하셨다.

 

이렇듯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을 넘겨줄 사람을 분명하게 밝히시지는 않았으나 모른 척 방관하지도 않으셨다. 즉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음모를 꾸미고 있는 당사자라면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 불행한 운명에 대해 경고도 하셨다. 그럼에도 돌이키지 않은 것은 분명한 유다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예수께서는 배신자가 누구인지 모호하게 말씀하셨기에 제자들은 당혹해서 서로 쳐다보았다. 답답한 베드로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이’(전승엔 요한복음 사가)에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시켰다. 요한이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은근히 "주님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보자 예수께서는 "내가 빵조각을 적셔서 그에게 줄 사람입니다." 하며 빵조각을 유다에게 주셨다.

 

자, 이 말 그대로라면 적어도 요한과 요한에게 알아보라고 시킨 베드로는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유다에게 "당신이 하려는 것을 얼른 하시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들 중 아무도 무엇 때문에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알지 못했다."(28절) ’유다가 돈 자루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심부름을 시키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정황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다.

 

또 하나의 궁금증은 예수께서 빵조각을 주고 유다가 받자 "그 때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사탄이 어디 눈에 보이는 존재던가? 눈에 보였다면 모두가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 구절도 요한복음 사가의 의도가 담겨있는 말이다. 무슨 의도일까?

 

예수께서는 자신이 손수 뽑은 제자 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유다인들 손에 넘겨져 불행한 일을 당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분은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고(예수님의 전지하심을 강조),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진 구세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즉 십자가의 죽음은 하느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고(=배반자에게,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 처참한 고통의 길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당하게 자발적으로 가셨다는 사실을 공관 복음보다도 더욱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사건이 아무리 하느님의 계획 하에 있는 사건이지만 예수께서는 제자의 배반을 기꺼워하시고 더구나 종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배신예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심령이 산란하여 비장하게 말씀하셨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몇번씩이나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유다는 알아들었어야 했다.

 

이제 같은 맥락으로 출애굽의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셨다"는 표현은 성서저자의 어떤 의도가 깔려있을까? 당시에 파라오는 태양신의 아들로 추앙받았다. 이에 성서저자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신(神)과 같은 막강한 위치에 있던 파라오일지라도 야훼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였음을 만방에 선포하고 있는 것뿐이다. 파라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움직일 수 있는 하느님의 전능을, 파라오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꿰뚫고 계시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니 섬기고 의지할 대상은 파라오가 아니라 주 하느님이시라고 이스라엘 백성들 뿐아니라 만인에게 알려주려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중세에 이 문장들에 대한 오해가 ’예정설’이라는 터무니없는 가설을 만들어내었으나 성서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난 자구적인 해석은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케하고 그분의 자비로운 구원계획을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아직도 일부에서 그 여파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느님의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확고한 의지는 출애굽 때나 예수님의 시대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고 이 점에 있어서는 인간이 저지르는 죄와 악마저도 구원의 도구가 될지언정 방해가 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기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를 구현하셨을 테지만, 그렇다고 <내가 유다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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