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진짜 배신은 무엇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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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3-28 | 조회수1,740 | 추천수14 | 반대(0) 신고 |
오늘은 진짜로 주님을 배신하는 행위는 무엇인지... 유다의 배반의 참된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유다의 배반의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인 이유?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것같다. 왜냐하면 은전 삼십냥은 종의 몸값(출애 21,32)이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멀었다면 사회적, 종교적으로 제거해야할 요주의 인물을 단돈 삼십 세겔에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 돈을 받고 넘겼다면 스승을 종의 몸값으로 넘길만한 비웃음과 모멸감이 숨어있을 듯하다.
실제로 마르꼬복음과 루가복음은 유다가 그냥 넘겨주기로 했는데 대제관들이 자진해서 은전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나중에 번복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던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예수를 넘겨주는 대신 "내게 무엇을 주겠냐?"고 물으니 제관들이 은전 서른 닢을 주기로 한 것이고, 예수께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엔 다시 그들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었다고 밝힌다. 유독 요한복음만이 유다가 경제적 문제에 밝았으며, 돈주머니에서 가끔 도둑질을 했었다고 비난하고 있다.(12,4-6)
그러나 현세적인 구국의 열망에 불타있던 열혈당원으로서의 유다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이유는 자명해진다. 향유를 바르는 여자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는 것도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의 구제에 쓰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지극히 현세적인 사람이었다고 이해된다. 요한복음은 배신의 이유를 유추하도록 유다의 인물됨을 미리 암시하면서도 막상 돈을 받고 팔았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정황들로 유다의 배신을 이해하자면 경제적 이유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상에 맞지 않는 메시아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열혈당원이라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폭력, 살인도 불사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아침도 이스라엘에서 자폭 테러가 발생해 90여명이 살상당했다.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열혈당원이다.
그런데 민족을 구해주러 온 구세주 그리스도가 수난과 죽음을 당하는 무력한 분이심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고통과 가난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적극 제거해야할 대상이지 그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으랴?
더구나 태생 장님을 보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진 분이 아니었던가? 자신이 저지를 배반의 음모를 알면서도 저지하지도 않고 그 안에 자진해서 뛰어들겠다는 그분을 이해하기에는 유다의 상태는 너무나 캄캄한 밤이었다.(13,31)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유다가 스승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유다의 믿음을 배신한 것이다. 어쩜 유다는 자신의 믿음의 끝을 보고 싶었느지 모른다. 즉 그분을 죽음 속으로 집어 넣어본 것이다. 극한 상황이 오면 돌변할 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러나 그분은 끝내 그의 믿음을 저버렸다.
스승 예수의 배신이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하느님은 이 지상에서 현세적인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세의 고통과 십자가를 덜어내 주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만이 참다운 승리와 영광, 즉 부활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증언해주셨던 것이다.
유다, 어쩌면 그의 진짜 배신은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배신할 것을 예고하면서 회개의 기회를 간곡하게 주시는 주님의 호소에 기어이 귀를 막고 있았던 것과 마지막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마태오 27,3) 돌아와 용서를 청하지 않은 것이 진짜 배신인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성서의 기록이 성취되어야할 일이었고, 그분의 일이었음을 밝히시는 스승의 의도는 비록 유다가 음모에 가담했다 하더라도 마음의 부담을 갖지말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최후의 식탁에서 말씀하신 예고는 베드로에게서처럼 자신의 행위가 잘못임을 깨달았을 때, 즉시 뉘우치고 공동체로 돌아오라는 주님의 요구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유다의 배신은 스승을 넘겼다는 것이 아니라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목을 매달았다는 전승(마태오 27,3-10)과, 땅에 고꾸라져서 배가 터져 죽었다는 전승(사도 1,16-21)이 함께 내려왔다. 성서에 두가지 전승이 함께 소개된다는 것은 실은 그가 어찌 죽었는지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손수 뽑고 혼신을 다하여 키운 공동체로 끝내 돌아오지 않고 떨어져나간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한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공동체에 속하는 것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떠한 비그리스도교적인 행위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배반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흔히 교회를 비난하며 혼자 믿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실망하고, 또 아무리 열심해도 성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사람들의 모임이 하도 별볼일 없어서 절망한다해도 그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기도는(요한 17장) 목이 메일정도로 절절하시다. 무슨 타당한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이같은 그분의 요구와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바로 배신이다. 분열과 공동체에서 벗어남이 가장 큰 배신이라는 말이다.
제자의 이탈을 바라보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실까? 일본의 한 수녀님의 시를 소개한다.
<하얀 길> -미쯔하라 유리-
오랫동안 헤매이다 마침내 바른 길 찾아오면 길은 아무 말 하지 않아
칭찬도 나무람도 짐될까 저어 "돌아왔니" 한 마디조차...
다만 지금부터 걸어갈 길 오롯이 하얗게 가리킬 뿐
걸어온 길 보담 지금부터 걸어갈 길이 늘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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