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날마다의 출애굽(5/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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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영숙 | 작성일2002-05-30 | 조회수1,515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마르코 복음 10,46-52
예수와 제자들이 예리고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앞못보는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오너라." 하셨다. 그들이 소경을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하고 일러 주자 소경은 겉옷을 벗어 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 묵상 )
길가에 앉아 있는 소경. 나의 문제점을 숨기기보다 여러 사람 앞에 드러낼 때 그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가질 수 있다. 그가 만일 집 안에 있었다면 예수님이 지나가는 소리를 결코 듣지 못했을 것이고 그에게는 치료의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죄가 있기 때문에 혹은 그 이외의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아직 성당에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되새겨볼 일이다.
듣고 그는 눈은 안보이되 그의 귀를 늘 열어둔 것이다 길거에 있는 많은 소리들 중에서 그가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는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기다렸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난 이 많은 세상의 소리에서 무엇을 듣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기도의 소망이 무엇이든 우리가 그분께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 아닐까 싶다. 허지만 이미 볼 수 있는 우리는 이미 자비를 받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감사합니다’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끝임없이 걸식증 들린 환자처럼 말한다." 무엇무엇을 해 주십시오" 이 엄청난 거식증을 참으시며 여전히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그분의 인내에 감동할 수 밖에...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과연 우리는 눈 뜬 사람인가? 눈 뜬 장님인가의 문제이다. 난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예수님을, 가난한 이웃을, 내가 사랑해야할 사람들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돈을, 명예를, 권력을, 재미와 금지된 것들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 난 이웃에게 성당을 가자고 권할 때나 혹 신자이면서도 여러문제로 힘들어 하는 이웃에게 무엇이라 말하는가? 이렇게 말해 보면 참 좋을 듯하다.
겉옷을 벗어 버리고 벌떡 일어나 그분 앞에 나아갈 때 걸림돌이 되는 것, 무거운 것들을 버리고 벌떡 일어나는 자세를 갖도록 할 일이다. 그분은 여전히 지금도 나를 부르고 있는 데 난 아직 안돼요. 친구 만나요 돼요, 놀러 가야 돼요, 아이들 때문에 바쁘다구요, 직장이 어때요. 등등... 그분은 우리를 아직도 기다리시는 데 여전히 우리는 무거운 짐들을 스스로 지고 있으면서 그 짐이 무거워 아직 일어나지 못한다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님이 내 눈을 틀림 없이 뜨게 해 주실거라는 믿음. 난 과연 내 문제점을 그분 앞에 온전히 내 보이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는 자세로 살고 있는지.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믿음의 완성, 온전한 믿음, 그것은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분은 그 소경의 성숙을 인정하신다. 난 예수님을 향한 믿음 안에 살아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인간의 기준 안에서 살며 나를 죽이고 있는가? 난 그분 앞에 어떤 자세로 있는가?
말씀이 떨어지자 곧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분의 말씀은 말씀일 뿐 여전히 눈을 감고 있으며 예수님처럼 사는 삶을 따라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내 식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여전히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따라 나서기 위해서는 ’떠남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구태 의연한 삶의 모습, 습관, 인간의 기준들 안에 여전히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일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니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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