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경거망동하지 말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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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7-19 | 조회수1,583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연중 제 15주간 금요일 (이사 38,1-6. 21-22. 7-8: 마태 12, 1-8)
내 눈길은 자꾸 오늘 독서에 머문다. 아시리아의 발굽 아래 예루살렘만 남기고 완전 포위되어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유다 왕국은 생각지도 않은 아시리아의 회군으로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다. 아시리아 내의 내부 분열이 일어나 산헤립왕은 다 잡았던 유다를 놔두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야했기 때문이었다.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히즈키야 왕은 한숨 돌리기도 전에 앓아 눕게 되었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듣게 된다.
"히즈키야는 벽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마치 면벽참선이라도 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히즈키야의 기도, 그의 슬픔이 단 두절로 간단히 기록되어있지만 이 구절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세상의 온갖 부귀와 영화, 근심과 괴로움, 모든 희노애락과 단절하고(벽을 향하여)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하였다는 말은 아닌가? 기도를 들어줄지 어떨지 <벽과 같이> 느껴지는 주님이었으나 그래도 그분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히즈키야의 심정을 말함이 아닌가? 히즈키야라고 어찌 죄를 짓지 않았으며 사악한 마음을 품어보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오, 주님, 제가 항상 당신 앞에서 참되게 살았으며 충성스럽게 당신을 섬겼고 당신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였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히즈키야의 기도는 주님의 자비에 의지해서 ’부디 자신의 악한 행동은 잊어주시고 선한 행동만을 기억해주십사’ 하는 절실한 호소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 기도를 하는 히즈키야는 매우 슬프게 울었던 것이다. 히즈키야의 속내를 어찌 그리 잘 아는가? 나도 그랬으니까.... 히즈키야의 슬픔과 탄원의 시간은 단 두절에 나온 바와 같이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히즈키야의 눈물과 기도가 주님을 움직이셨다. 주님의 말씀이 다시 이사야에게 내리고 히즈키야는 살아났다. 십오년의 수명이 더 연장된 것이다. 나의 눈물과 기도도 주님을 움직였는지 나 역시 살아났다. 그러나 내게 몇 년 더 수명이 연장되었는지 가르쳐줄 예언자는 없다. 오년 연장? 십년 연장? 사실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이다. 길어야 팔십년? 근력이 좋아야 백년?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히즈키야는 병이 낫고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감동적으로 부른다.(화답송) 그런 히즈키야도 바빌론의 특사를 맞이하여 자국의 보물창고를 모두 열어 보여 주는 경망스러운 행동을 한다. 그 때문에 이제 유다는 바빌론의 침공을 받으리라는 이사야의 책망을 또다시 듣게 된다.
엊그제 독서는 아시리아의 멸망을 예언한 대목이었다. 비록 일시적이지만 하느님의 도구로 쓰였던 아시리아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경거망동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에 하느님은 아시리아에게도 징벌을 내리시기로 결정하신다.
오늘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정말 나에겐 가르쳐줄 예언자가 없는가? 아니다. 오늘 분명히 주님은 직접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자비로 다시 살아났다고, 현재 주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고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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