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깊은 슬픔
이전글 이전 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깨달음 안의 생명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02-09-16 조회수2,474 추천수29 반대(0) 신고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루가 7장 11-17절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손을 멈추었다. 그 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다."

 

 

<깊은 슬픔>

 

언젠가 겨우 일곱 살 된 아이를 먼저 떠나 보낸 한 어머니의 주체못할 슬픔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건만 결국 싸늘하게 식은 아이의 시신 앞에 오열하는 어머니에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이가 떠나간 빈자리는 너무도 커 보였습니다. 식사는커녕 밤잠마저 이루지 못해 몰골은 말이 아니게 변해 갔고, 하도 울어 눈물마저 말라버렸습니다.

 

그렇게 잊으려 잊으려해도 스쳐 지나가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죽은 아이와 연결되어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또래 아이들만 만나면 즉시 가슴이 미어져왔습니다. 평소에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만 봐도 당장이라도 "엄마!" 하고 외치며 아이가 뛰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슬픔 중에 가장 사무치는 슬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슬픔은 무엇보다도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슬픔인 듯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인성의 과부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과부란 것만 해도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거기다 외아들까지 잃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나인성의 과부가 느낀 슬픔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나서 여인에게 펼쳐진 고통의 세월은 그나마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외아들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움이 복받칠 때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아들을 보며 달랠 수 있었습니다. 과부이기 때문에 손가락질 당할 때마다 효성 지극하고 총명한 아들만을 바라보며 견뎌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과부의 삶은 외아들의 죽음으로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과부의 통곡소리가 얼마나 크고 슬펐던지 나인성 구석구석까지 그 소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너무도 안쓰러운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장례 행렬에 참여하여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사무치는 슬픔을 자비의 예수님께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있는 과부의 얼굴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다가가십니다. 지칠 대로 지친 과부의 어깨에 손을 엊으시며 따듯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슬픔의 원천인 죽음마저 물리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십니까? 잘나서? 예뻐서? 사목을 잘해서, 기도를 열심히 해서?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도 사랑하시겠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의 결핍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한계, 우리의 과오, 우리의 실수, 우리의 치부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