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1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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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2-10-03 | 조회수1,676 | 추천수19 | 반대(0) 신고 |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욥기 19,27)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하늘이 열린 개천절에 귀한 손님들이 왔다. 지난 9월 17일에 사제로 서품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3명의 새사제들이 우리 공동체에 와서 첫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이쁘고 순수한 모습으로 보이던지 나의 사제 서품 때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 점점 더 맑아져야 하는 사제의 생활, 수도자의 생활이어야 하는데 갈수록 더 추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신서약이나 사제서품 때의 열정은 오늘 욥이 말하듯이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는 그런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갈수록 그 열정은 식어가고 이제 <하느님을 뵙든지 말든지...> 하는 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욥의 말처럼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 갈수록 그 열정은 식어갈 수밖에... 그래서 이제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사람을 만나는데> 더 치중하고 <일을 처리하는데> 더 몰두하면서 사람을 통해, 또 일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자 한다고 타협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왠지 하느님을 뒷전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나 일을 앉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첫번째요 그 다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요 마지막이 일을 만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순서를 뒤바꾸는 것은 사실은 하느님 만나기를 포기하는 것이요 사람을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고 봐야 한다.
새 사제들의 하느님 만나는 그 열정을 기원하면서 나 또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나의 최우선 과제임을 다시 기억하며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는 욥의 말을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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