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소문은 무성한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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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3-02-06 | 조회수1,608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연중 제4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6,14-29
<예수의 정체에 대한 군중들의 소문>은 대체적으로
1.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 2. 엘리야 3. 예언자 중의 한 분
으로 집약되었다는 소식을 마르꼬 복음사가는 전해주고 있다.
군중들의 소문들은 "예수는 누구신가?"에 관한 궁금증을 한층 더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르꼬 복음의 으뜸 주제가 바로 "예수는 누구신가"하는 것에 대한 답변을 고백하고 있는 복음이며 그 답변을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복음의 중간(베드로의 고백)을 기점으로 앞부분에는 예수의 정체가 철저히 비밀로 함구되고 뒷부분에는 서서히 비밀이 벗겨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를 굳이 이름을 붙여 앞부분을 <비밀의 시기>, 뒷 부분을 <계시의 시기>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이제 앞부분에서의 막바지가 거의 다가오기 전에, 예수의 정체에 관한 소문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분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불러 일으킬 의도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대목에 이어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바로 뒤에 전함으로써 예수의 운명 역시 세레자 요한처럼 아무 죄도 없는 의인이 그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어떤 이들의 음모에 의해 어이없는 폭력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암시도 들어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정체에 관한 소문이 다시 8장 28절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마르꼬 복음이라면 가장 짧은 복음서이고 복음사가는 언제나 군더더기를 제거한 간결한 표현법을 즐겨쓰는 분임에도 두번씩이나 중복된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 데에도 어떤 의도가 있을 듯하다.
예수에 관한 소문을 두번 중복해 보도하며 은근히 "예수는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다시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예수의 신비를 벗겨내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또 한가지는 두 대목에서의 비교가 되는 점, 즉 소문을 들은 사람의 반응에 대해서도 주목해보기를 원하고 있는 듯하다.
즉 6장에서의 헤로데 안티파스의 반응과, 또 8장에서의 예수님의 제자들의(대표격인 베드로) 반응을 비교해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지 싶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다시 살아난 요한’은 군중들도 생각했던 것들 중 하나이다.(위의 1.) 그러나 그 생각의 동기는 전혀 달랐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의인이 타살되면 다시 살아나 놀라운 위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겼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중들이 예수를 세례자 요한의 재생이라고 본 데에는 예수의 기적 능력을 보고 생각한 것이다. (참고: 사람들이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이라고 하는 이유)
그러나 헤로데 안티파스는 같은 생각이라도 그 심적 동기가 다르다. 바로 뒷 대목에서 밝혀주듯 자기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이 원인인 것이다. 그야말로 ’뒤가 캥기고 있는’ 것이다.
뒤가 캥기는 사람은 헤로데 안티파스 하나도 아니다. 헤로디아도 그렇고, 헤로디아의 어머니 살로메도 그렇다.
자신의 안위와 기득권을 위협하고,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들춰내는 사람들은 누구나 싫은 법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든 제거해야 하고 주변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우리도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감추려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그런 존재를 주변에서 멀리 떨어뜨려버리려 애를 쓰고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에게 그를 제거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져있어도 헤로데와 같지 않을 수 있을까?
살로메는 이런 헤로데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고, 딸을 이용해 음모를 꾸몄다. 헤로데는 마지못해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세워 ’앓던 이’를 뽑아버렸다.
물론 세레자요한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그는 이 대목에 나타난 것처럼, 헤로디아의 춤에 대한 보상으로 참수된 것이 아니라, 군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큰 인물로 나타남으로써 군중을 선동할 위험있는 인물로 분류되어 정치적 이유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헤로데에게 정치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떤 위협을 계속 주었고 그를 껄끄럽게 생각했던 헤로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면에서 이런 재미있는 설화를 만들어 줄기차게 퍼뜨렸던 것이다.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해 사실적인 증언보다도 민간에 떠돌던 이야기를 채택하여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의 그릇된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매우 어렵다.
군중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기적의 힘에 매료되어서도 제대로 볼 수 없고, 전해내려오는 전통적 믿음에 꿰 맞춘 어떤 분으로만 즉 관념적 존재로만 보아도 아니되고 , 자신의 죄책감이나 두려움에 의한 허상으로 만들어도 참된 예수의 정체를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8장의 소문과 연결된 제자들(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예수와 <함께 있으려고>(3,13) 선택된 자들이다.
예수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무수한 소문을 잠재우고, 그분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척도인 것이다. 물론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럴듯한 답변을 하지만 곧 이어 면박을 당했다. 그가 알아본 예수님의 모습도 온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분과 함께 있었기에 그만한 대답도 했던 것이고, 면박을 당했어도 그분과 함께 있음으로써 다시 정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는 자만이 예수의 참된 신비 속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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