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의 향기 (부활축제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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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4-22 | 조회수1,613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 2003년 4월 22일 (화) - 부활팔일축제내 화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20,11-18 <나는 주님을 만나 뵈었고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일러 주셨다.>
[복음의 향기] 요한복음은 예수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20장과 21장에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요한복음은 원래 20장을 마지막으로 편집되었고, 21장은 나중에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21장을 단락으로 구분하면,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발현, 예수와 수제자(首弟子) 베드로, 예수와 애제자(愛弟子), 에필로그(맺는 말)의 4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곰곰이 살펴보면, 이 대목을 추가로 편집해야 했던 의도, 또한 쉽게 밝힐 수 있다. 즉, 예수님을 이미 배반한 적이 있는 베드로(요한 18,15-18.25-27)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단의 으뜸으로, 그리고 초대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인정하고 내세우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특별한 관계를 엮어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특히 첫 단락 마지막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21,14) 라고 명기(明記)함으로써 앞서 두 번의 발현(20장)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점이 흥미롭다. 아무튼 요한복음사가의 원복음(原福音)은 20장으로 끝난다. 요한복음 20장은 총 5단락으로 편집되어 있다. 첫 단락은 빈 무덤 사화(1-10)로서 부활대축일 낮미사 복음으로 읽은바 있다. 두 번째 단락은 예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발현하신 내용으로(11-18) 오늘 복음에 해당한다. 세 번째 단락은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첫 번째 발현(19-23)을 기록하고 있으며, 네 번째 단락은 예수님의 첫 발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 토마의 불신앙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발현을 통한 부활확인을 다루고 있다. 다섯 번째 단락은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단락은 서로 연결 지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다가오는 부활제2주일 복음으로 듣게될 것이다. 우리가 요한복음 20장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1,2,3 단락은 단 하루(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서 저녁까지)에 일어난 사건을, 4단락은 정확히 여드레 후 같은 날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1단락의 내용 :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달음질을 하여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간 것으로 알린다. 이 말을 두 제자는 곧 무덤으로 달음질쳐 간다. 애제자가 더 빨랐으나 안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곧 뒤따라온 수제자가 무덤 안에 들어가 본다. 수의만 있고 예수의 시체는 없었다. 그제야 애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제자는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결론은 빈 무덤에 대한 믿음이다.] 오늘 복음은 요한 20장의 두 번째 단락으로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발현을 다루고 있다. 두 제자가 무덤을 떠난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그 자리에 남아 울고 있었다. 마리아의 머릿속은 주님이 없어졌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게다가 울고 있었기에 객관성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그녀가 무덤 안에 나타난 두 천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자기 뒤에 서 계신 예수를 보고도 동산지기로 오인하여 없어진 주님을 내놓으라고 한다. 결국 예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 하고 이름 붙여 부르자 "라뽀니" 하고 응답함으로써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와 비슷한 대목에서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도록 허용했다.(마태 28,9/월요일 복음)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곧 바로 부활증인으로 임명하고 부활소식을 전하는 사도로 파견하고 있다. 마리아는 주님을 잃은 슬픔에다 시체 없는 빈 무덤 때문에 슬픔이 가중되어 울고만 있었고, 그녀의 생각과 시선은 빈 무덤에 고착되어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슬픈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자주 그 일에만 시선을 집중하여 아파하고 걱정하고 억울해 하며, 때로는 땅을 치며 운다. 그러니 자기 뒤에 무엇이 있는지,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깨달을 수가 없다. 이럴 때 귀를 세우고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그러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빈 무덤이 부활신앙의 씨앗이 될 수는 있으나 빈 무덤 자체가 부활신앙은 아니다. 마리아는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요한 10,1-6: 목자와 양의 비유 참조)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아 부활신앙을 얻는다. 이 때 얻게된 신앙은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나를 붙잡지 말고") 파견과 선포의 임무를 가지는 것이다.◆ [늘 보는 눈과 늘 듣는 귀만으로는 주님을 뵙기 어렸겠습니다. -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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