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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의 향기 (부활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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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4-27 조회수1,598 추천수4 반대(0) 신고

◎ 2003년 4월 27일 (일) - 부활 제2주일

 

[오늘의 복음]  요한 20,19-31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복음의 향기]

 

요한복음은 예수부활 사건과 부활예수 발현사화를 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20장과 21장에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이 초대교회 안에서 제고되는 베드로의 역할을 교회론적이고 사목적인 측면에서 강조하기 위하여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학자들의 통설을 따르면, 오늘 복음(20,19-31)이 요한복음의 종결부분이다. 20장은 다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단락(1-10절): 빈 무덤 사화를 통한 예수부활사건. ②단락(11-18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예수의 발현. ③단락(19-23절): 부활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첫 번째 발현. ④단락(24-29절): 부활예수의 첫 발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 토마의 불신앙과 이에 대한 두 번째 발현을 통한 부활확인. ⑤단락(30-31절): 맺음말. 오늘 복음은 ③,④,⑤단락을 한데 묶어 놓았다. 각 단락이 보도하는 내용의 형식을 분석하여 본다면 ①,②,③.④단락은 직접화법을 사용한 상황보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⑤단락은 단순설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승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①과 ②단락이 같은 전승에 속하고, ③과 ④단락은 앞선 부분(빈 무덤 사화, 부활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독자적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의도하는 복음저술의 결론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著者)는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30절)이 복음서 저술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이 목적을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이 신앙에로 전환되는 사건에 연결시키고 있다. 복음서 저자는 결국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 앞에 토로(吐露)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라는 신앙고백이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도 복음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모든 참 행복자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강론 : 토마스는 "미꾸라지"인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의 생각과 말은 2000년 세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토마스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기 전에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믿겠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 이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이 가지는 불신(不信)의 한 유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신성? 성서가 보도하는 기적들? 동정녀의 잉태? 죽음후의 영생? 육신의 부활? 등등에 대하여 믿음보다는 의심을 가진 신자가 적지 않다는 말이다. 개개의 신자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믿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에 대하여는 말하기를 꺼려하고 심지어는 거절하고 불신한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믿음의 조목(條目)이 문제시된 것이 아니라 믿음 전체가 거꾸로 선 것이다. 즉, 예수 전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예수가 살아 있느냐, 죽고 없느냐?" 에 토마스 자신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말이다.

 

우리 눈에 토마스는 우선 제자들 가운데 한 마리의 "미꾸라지"로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제자단에 미꾸라지는 더 많다.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확인함" 없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졌는가?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말씀이다. 예수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들은 한결같이 부활에 대한 의심을 믿음의 동기로 제시하고 있다. 불신과 포기와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만남 없이는 3년 동안이나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믿는데 어려움을 가진다. 토마스 사도의 생각이 옳았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의 부활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모두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 바울로 사도의 신앙고백이지 않는가?(1고린 15,17)

 

오늘 복음이 전해주듯이 부활한 자는 불신자의 의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눈으로 예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자기의 손을 예수의 옆구리에 넣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토마스는 부활예수를 자신의 손으로 확인하기 전에 "만남" 그 자체로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고백한다. 사실(事實)을 보는 것이 믿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보았지만 모두 그분을 믿지는 않았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마치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공리같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확실한 증거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공식이나 공리 따위에는 인간의 자유가 차지할 공간은 없다.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유와 신뢰와 희망으로 살았던 신앙의 증인들 위에 서있다. 그 증인들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마태 28,20)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다. 한때 불신의 "미꾸라지"였던 토마스나 다른 사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듯이, 우리도 믿음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류를 위해 바쳐진 몸으로 계신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사(聖事)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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