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의 향기 (부활3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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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5-09 | 조회수1,57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 2003년 5월 9일 (금) -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6,52-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복음의 향기]
예수님의 가르침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더니(41절), 오늘 복음에서는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51절) 라는 말씀 때문에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면서 서로 따지기 시작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성서의 기록에는 없지만 이 구절 다음에 "우리가 무슨 식인종이란 말인가?" 라는 한 마디를 덧붙여 우리들 사고의 지평을 넓혀보자. 식인종(食人種)이란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는 미개인종(未開人種)을 일컫는 말로서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뜻한다.
우리는 통상 인육(人肉)을 음식(飮食)으로 먹는 개화(開化)가 덜된 인종들을 식인종이라고 알고 있다. 왜 식인종들은 인육을 음식으로 먹었을까? 일용할 양식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적대자나 원수를 잡아죽인 다음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했던 것일까? 카니발리즘(cannibalism)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인류문화사 계통의 학자들은 오랜 옛날부터 세계 각지에서 이런 풍습이 행해진 것으로 추정한다. 미개한 인종들 사이에서 굶주림이나 복수, 종교의례나 효행 등의 이유에서였다고 하나, 비교적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종족에서도 가끔 제례의식과 관련하여 행해진 흔적이 있다. 카니발리즘은 대략 뉴기니 내륙지방, 서부 및 중앙아프리카,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수마트라의 바타쿠족, 남북아메리카의 여러 부족, 북극지방의 에스키모 등지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지역에 따라서 인육은 굶주림 때문에 실제로 음식이 되기도 하였고(북극지방 에스키모), 식품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시장에서 매매되기도 하였으며(바타쿠족), 멜라네시아에서는 동물의 고기와 같이 취급되기도 하였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의례적 살인과 식인(食人)은 종종 사술(邪術)이나 요술(妖術)의 관행과 결부되었고, 병자(病者)가 그의 친족에 의하여 잡아먹히는 수도 있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경우에는 승자(勝者)가 싸움에서 죽인 자의 살을 베어 승리의 축하잔치에 썼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일부에서는 영혼(靈魂)을 배당 받기 위해 죽은 사람의 인육(人肉)을 먹고, 그 뼈를 보존하는 풍습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종교·의례적인 의미에서 사자(死者)의 특정 부분 또는 내장 부분을 먹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먹은 사람은 사자의 영혼과 힘을 얻는다는 생각이 학자들의 통설(通說)이다. 결국 카니발리즘은 사자(死者)의 영혼(정신)과 힘을 이어받고자 자민(子民) 보호적 차원에서 행해진 종교적 관행이라는 말이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밀림 한 가운데서 맹수나 적대자로부터 부족을 지키던 한 용사(勇士)가 목숨을 바쳐 죽었을 때,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부족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종교적 의례를 거행하였을 것은 매우 있을법한 이야기다. 이 자리에서 다음 용사가 죽은 용사의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의 부족을 위한 정신과 힘을 이어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이 우리 육신(肉身)을 위한 양식이 되든, 영혼(靈魂)을 위한 양식이 되든 간에 예수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시는 행위는 카니발리즘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의 불평에도 아랑곳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강행된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믿음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더욱 더 강하게 당신 몸을 먹고, 당신 피를 마실 것을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는 살뿐 아니라 음료로 자신의 피까지도 내어 주신다.(55절)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의 전부(全部)를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예수를(나를) 먹는 사람도 예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절)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사가가 제시하는 성체성사(聖體聖事)의 설정이다. 공관복음이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마태 26,26-30; 마르 14,22-25; 루가 22,15-20; 1고린 11,23-26),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자신의 공생활 한 가운데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성체성사가 그분의 죽음을 기억하는 점에서는 카니발리즘과 같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뿐 아니라 그분의 부활을 선포하는 성사이기에,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점이 카니발리즘과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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