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요아킴과 안나) | |||
---|---|---|---|---|
이전글 | 악이라는 것은 | |||
다음글 | 사랑의 강물, 위로의 바람 | |||
작성자박상대 | 작성일2003-07-26 | 조회수1,535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 2003년 7월 26일 (토) -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성모 마리아의 부모이며, 예수님의 조부모이신 요아킴과 안나에 관한 기록은 예수님의 족보(마태 1,1-17; 루가 3,23-38)에서도 신약성서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름이 없다고 해서 마리아의 부모님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론되지 않을 뿐이다. 초대교회에 이르러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앙양되는 가운데 마리아와 관련한 서적이나 기도문에서 요아킴과 안나의 이름이 마리아의 부모님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안나(Anna)라는 이름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Hanna)를 연상케 하며(1사무 1,2-2,21), 남편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여인이다. 그후 두 성인에 대한 신심은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10세기경에는 서방교회로 퍼져갔다. 1972년 개정된 로마 미사경본에서 종전 8월 16일 요아킴의 축일과 7월 26일 안나의 축일을 오늘 7월 26일로 합쳤다.
두 성인의 성덕과 신앙의 모범적 행위는 마리아와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가정 분위기로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마리아가 성서를 통하여 보여주는 의사결정에 대한 결단력, 끊임없는 기도 행위, 율법에 대한 모범,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확고 부동함, 친척들에 대한 헌신 등은 두 성인의 가정이 하느님께 얼마나 깊은 신심을 가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두 성인은 예수님의 조부모로서의 역할도 틀림없이 충실히 수행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예수가 - 물론 마리아와 요셉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지만 - 할아버지 요아킴과 할머니 안나를 통하여 구약의 율법과 율법의 정신을 배우고 익히며,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심을 키우고, 인간으로서 그리고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켜나갔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 마태 13,24-30 <추수할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그 때에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2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드러났다. 27)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 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 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29) 주인이 대답하였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선인과 죄인이 공존하는 교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비유설교로서 밭에 뿌린 좋은 씨, 즉 밀과 가라지의 비유이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는 데, 밤새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오직 마태오복음에만 있다. 마르코복음은 같은 대목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4,26-29)를 전해 준다.
비유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비유가 왜 양성되었는지를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즉 비유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 마르코복음 공동체에서는 이런 의문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도래와 그분의 말씀과 행적으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왜 이렇게 더디게 성장하는가?" 라는 것이다. 그에 비하여 마태오복음 공동체에서는 "좋은 씨를 뿌려 좋은 열매만 자라나야 할 하느님의 밭에 왜 가라지가 함께 자라나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곧 파종과 수확이라는 시간 속에 아무도 모르게 함께 자라난 가라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따라서 마태오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나 마르코의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당시의 교회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어버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결국 마르코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곧 완성되리라는 지나치게 성급한 종말론적 관념을 수정하여 바로잡아 주려했고, 마태오복음은 교회가 선인(善人)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罪人)과 공존(共存)하는 공동체임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선인과 죄인이 함께 뒤섞여 사는 교회의 실태에 매우 잘 어울리는 비유이다. 교회는 거룩하지만 교회의 구성원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성원은 아무도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교회에 관한 교의신학은 세 가지의 교회를 말한다. 지상의 교회(지상여정의 교회), 천상의 교회(개선교회, 천상성인들의 교회), 정화의 교회(단련 받는 교회, 연옥의 교회)가 그것이다.(교회헌장 7장 참조) 종말에 이르러 완성되기 전까지 교회는 이 세 가지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상태적인 관점에서 보면 각각의 교회는 독립적이지만 신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하나이고 서로 밀접하게 교류한다.
교회 안에는 늘 죄인들을 선인들로부터 가려내어 단죄하고 격리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교회가 선인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함께 성장하여 간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섣부른 선별작업에서 선인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29절) 오늘 비유에서 밀과 가라지를 선별하는 작업은 그렇다하더라도, 우리 사람들 중에 누가 있어 선인과 죄인을 정확히 구별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선인과 죄인의 구별은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종말심판에 맡겨져 있다. 그때까지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인내와 관용의 시간이다. 교회는 그저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淨化)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悔改)와 쇄신(刷新)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교회헌장 8항)◆[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