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린이"에 대한 오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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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3-08-12 | 조회수1,533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말씀(신명31,1-8: 마태 18,1-5.10.12-14)
신약성서가 쓰여지던 1세기 당시의 ’어린이’와 21세기의 ’어린이’에 대한 개념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도 소파 방정환님이 ’어린이’란 말을 만들게 된 동기는 당시에 사회적으로 무시되던 아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에서였다고 들었다. 이처럼 고대에는 ’어린이’란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손에 의존해야 하는, ’덜된 어른’ 쯤으로 생각했었다.
사도 바울로도 갈라 4,1에서 ’상속자도 미성년인 동안에는 종과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당시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현재 우리와 같이 ’어린이’에게서 단순하고 천진무구한 그런 종류의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전제하면 복음 말씀은 또 다르게 들린다.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심지어 그와 같이 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부정적 시각을 염두에 둔다면 이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인 놀라움이고 어리벙벙한 말씀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어른이 된 제자들보고 일부러 어리석고 모자란 어린이와 같이 행동하란 말인가?’ 아니다. 오늘은 교회공동체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설교(18장)의 첫부분이다. ’하늘나라’라는 상징이 말해주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린이처럼 취급되는 사람들, 즉 신앙이 미성숙하다고 여겨지는 ’작은 이’들을 교회의 지도자들은(또 공동체 식구들은)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관해서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다.
교회의 어린이들(작은이들)은 믿음이 약하여 조그만 충격에도 넘어지고 좌절한다. 그들은 교회 밖에서 손짓하는 온갖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고 견뎌내지도 못한다. 그들은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새싹이나 다름없다. 신앙에 있어서만 나약한 것이 아니라, 사실 사회적으로도 별다른 능력도 없어 보이고, 특출한 의견도 없는 듯하고,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한, 그야말로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이들이기도 하다.(실제로 요즘 교회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공동체 안에서’어린이’들이란 결국 공동체 안의 ’위대한(?)’ 이들의 반대 개념인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한편으로 밀어놓을 것이 아니라 마음 <한 가운데> 두고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보살펴야 한다. 마치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목자와도 같이(12-14절). 그들을 돌보는 천사들이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10절),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아버지는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14절)을 언제나 명심하라고 예수께서는 누차 강조하신다.
그럼에도 현실은 어떠한가? 오히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조차도 무수한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유능함을 뽐내고, 경제력을 뽐내는 무수한 ’위대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들은 주눅들고 눈치보고 업신여김받고 끝내는 교회를 떠나는 일은 없는가? 지도자들의 무시와 냉대를 견디다 못해 상처받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일은 없는가? 바로 그런 무심하고 냉정하고 목이 뻣뻣한 교회의 지도자들, ’위대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아마도 신약성서에서 가장 무서운 선언을 명백히 내리신다. 오늘 복음에서 빠진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걸려넘어지게 하는 자는 그 목에 나귀가 돌리는 연자매를 달아맨 채 바다 깊숙히 빠지는 편이 오히려 그에게 이롭습니다...."(계속 끔찍한 질책의 말씀이 이어진다.) 비록 과장된 말씀이긴하지만, 그만큼 엄중하게 문책하겠다는(최후의 심판 25장과 같은) 말씀이시다. 그러니, 이제 교회의 ’위대한’ 사람들은 그만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교회에서 실컷 봉사하고 희생 자선하고 종국에 예수님께 이런 문책을 받아서야 되겠나?
보잘 것 없는 이처럼 보이는 이에 대한 보다 세심한 배려! 능력을 바쳐 헌신하면서도 자기를 낮추는 겸손! 아버지의 능력에 대한 어린이와 같은 의탁! 예수께서 교회 공동체 지도자(또는 봉사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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