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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헌장 112항 (b) 본문과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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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헌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02 조회수2,596 추천수2

112항 b: "사실 성경도 거룩한 교부들도 성가에 대하여 훌륭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현대에 있어서는 성 삐오 10세를 비롯한 로마 교황들도 의식에 있어 성음악의 봉사적 임무를 뚜렷이 밝혔다."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노래가 성서 안에서 또 교부들이나 로마 교황들에 의해 얼마나 찬양되었는가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과거 400년간에 열렸던 공 의회에서 노래와 음악에 대해

문서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음악의 특정 문제에 대해서였다. 다만 예외로서 트렌트 공의회의 교령을 들 수 있다. 이는 성음악에 세속적인 요구가 들어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 교령 "De observandis et evitandis in celebratione missae" 트렌트 공의회 제22회 총회, 1562년 9월 17일. 이 내용의 주된 것은 옛 교회법전 안에 있다(1264조 1).)

 

 

1) 성서 교회 음악의 기원은 구약 성서 안에서 발견된다. 성서는 첫 남자와

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에게 입과 혀와 눈과 귀를 주셨고

마음을 주시어 생각하게 하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시고 선과 악을 분간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고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속에 눈을 주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업적을

영원토록 찬미하게 하셨다. 사람들은 거룩하신 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주님의

위대한 업적을 전하리라."(집회 17, 6-10) 또 유대의 족장들은 일찍부터 하느님을

찬양하고 제물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었고, 한편 모세는 히브리인의

생활에서 기도를 정확히 규정했다(창세 4장; 출애 15장; 레위 2장; 민수 4장 이하;

신명 26장과 32장). 전례에 관해 모세가 행한 것은 분명히 제시된 하느님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기 위함이었다. 즉 하느님은 7월의 첫날을 안식 일노 정하고

거룩한 집회의 날로 정하고 악기를 울리며 (clangentibus tunis) 이 날을

기념하도록 명했다(레위 23, 23-25). 분명히 제시된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성음악은 안식일과 같이 하느님이 정한 것이 되었다. 이때부터 음악은 전례와

밀접히 결부되어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이 전례에서 음악을 쓰는 것이

히브리인의 의무가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전쟁을 시작하기 전뿐

아니라 제물을 바칠 때에도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두 개의 은나팔을 불도록

요구해 당신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나팔을 부는 것을

사제들에게만 위임했다. "제전의 날과 매년 정한 제일과 매달 초하룻날에

너희들은 희생을 봉헌할 때 나팔을 불어야 한다. 이리하여 너희들은 자신들의

하느님을 회상할 것이다. 나는 너희들의 하느님인 주이다."(민수 10, 1-10 참조)

유대인의 생활 안에서 음악은 특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음악을

사용하도록 분명히 요구했기 때문이다. 다윗의 시대가 되면서 그 지도에 따라

성음악이 완성되어 의식에서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다윗은 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4천명의 노래하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합창단을 정해 그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예컨대 그들에게 사제와 같은 삼으로 된 옷을 주거나 성전 안의 좋은

장소에 숙소를 정하기도 했다. 또 다윗은 노래 반주를 위해 현악기와 관악기와

타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의 단체를 만들었다.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셉푸스(Flavius Josephus, 37- 95)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이 성가를

집성함과 동시에 자기도 새로 운 성가를 만들었다. (Antiquit. Judaic., Ⅶ, 10.) 이

성가가 시편이다. 이 새로이 종합된 노래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향한

기도이다. 어떤 때 시편의 작자는 천지 창조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또 다른 때에는 하느님께 향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시편은 하느님 나라가 이스라엘뿐 아니라 신앙을 갖지 않은 다른 모든 나라에도

도래한다는 예고와 그 도래에 이르는 준비에 대한 유대 민족의 생각과 기분을

나타내고 있다. (Pirot, La Sainte Bible, Paris 1937, t. v. Les Psaumes,

Introduction, p. Ⅹ Ⅴ.) 시편은 오늘날도 그리스도교 신자의 기도와 불가분의

것이다. 요컨대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바빌론의 포로 생활 을 마치고 조국에

돌아온 후의 예언자들이 성음악에 관해 행한 것은 모두 모세에게 드러낸

하느님의 의지를 수행하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스도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 17)라고 말했으나 이 말에서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즉 하느님에 의해 구약 안에서 정해진 성음악은 율법의 일부분이므로

성음악은 그리스도가 의도한 율법 전체의 완성과 더불어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규칙을 성전이나 회당에서 엄격히 지켰다."그들은

시편을 노래하면서 올리브 산에 올라갔다. "(마태 26, 30,또 마태 26, 25; 마르 16,

26; 루가 4, 17; 요한 7, 8; 7, 10- 11 참조)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최후까지

파스카의 축제를 위해 율법에 의해 정해진 시편을 충실히 노래했던 것이다. 사도

행전에는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가 유대교의 전례 의식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사도 5, 12, 5, 24; 5, 20). 이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새로운

전례를 만들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고, "많은 유대교의 사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므로"(사도 6, 7)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두 구약의 율법 규정을 그대로

지켰던 것 같다. 새로 갓 생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전례 의식에서 갑자기

분리되어 버린 것은 아니다. 예컨대 유대교의 성음악 특히 유대교의 회당 음악은

새로 만들어지고 있었던 그리스도교의 전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성 회당

음악이란 독창으로서 곡을 붙이지 않고 자유로운 리듬으로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낭송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성음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 시편의

낭송으로서 유대교에서의 그 원형은 기원 4세기 이전 혹은 3세기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것 같다. (J. Chailley, Histoire Musicale du Moyen Age, Paris

1950, pp. 26-27.) 전례 헌장의 각주는 성바울로의 두 가지 문장(에페 5, 15; 골로

3, 16)을 들 고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가 집회에서 노래하는 경우, 이 두

가지 성바울로의 말을 지침으로 해야 한다. 성바울로의 문서는 두 가지 다 같은

내용으로 여기서는 그 중에 제 2의 것을 인용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모두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십시오. 그리고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골로 3, 16) 성바울로 시대에 유대교의

전례 성가의 기본은 시편의 낭송이었다. 독창자가 시편을 낭송하고 이에 대해

신자들은 알렐루야나 아멘과 같은 대화구나 반복의 말, 즉 독창자가 낭송하는 말

전체를 요약한 시편의 1절을 사용해 때때로 응답했다. 이것이 유대교의 회당에서

당시 행하고 있던 형식으로 생긴지 얼마 안 되는 그리스도교는 이 형식을

채용했던 것이다. (J. Chailley, op. cit. p. 25) 위에 인용한 서간에서 성바울로는

'마음 속으로' 노래하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혀끝으로 노래하는 것뿐 아니라

성령에 충만되고 싶다면 마음속으로 노래하자는 의미이다. 성히에로니무스(5.

Hieronymus, 342-420)는 이 '마음 속으로'란 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교회 안에서 특히 시편을 낭송하는 사람은 입뿐 아니라 마음으로 노래해야 한다.  

공의회가 성바울로의 두 가지 문장을 인용한 이유는 성바울로가 그리스도교의

전례 및 전례 노래의 기초를 쌓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구약의 세계에서는 전례의 노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약에서 이

지위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으나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일반적으로 기도에 대해, 특히 노래에 대해 행한 가르침에 따라(사도

2, 46-47) 전례 의식 안에서 노래에 중요한 위치를 주는데 크게 공헌했다. 여기서

성이시도루스(S. Isidorus, 570-636)의 다음의 말을 상기하자. 즉 교회 음악은 그

근원이 성서 안에 있으면 있을수록 더한층 전례에 합당한 것이 된다. (Isidorus,

De Eccl. offic., lib. I, C.VI : PL82, 743)

 

2) 교부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전례 의식은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한편 3세기에 이르기까지 전례 의식은 각 지방마다 달라져 있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그리스도교 전체에 대한 규칙은 없고, 그리스도교 신자 단체에

따라 적당한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또 신자가 모여서 하는 기도가 전례적인

기도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3세기가 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생활 관습이 서서히 확립되고 전례의 기도가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어떻게 이 기도의 집회에 참여했던 것일까? 먼저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 봉독과 강론을 듣고, 다음에 시편이나 성가나 찬가를 노래해 하느님

말씀에 응답했다. 시편은 시편에 있는 150편의 노래이다. 성가는 성서 안에

포함된 시편의 형식을 가진 시편 이외의 노래이다. 찬가는 교회가 만든 노래이다.

시편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드리는 기도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시편은 예수에

대한 것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루가 24, 44). 성가는 구약 성서 안에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어떤 것은 성무일도 찬가 안에서 현재도 아직 불리고 있고 그

위에 신약 성서 안에는 Bene dictus와 Magnificat과 Nunc Dimittis란 세 가지

성가가 있다 현재도 아직 부르고 있는 찬가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Te Deum과

미사의 Gloria in excelsis이다. 위에서 말한 것은 거의 인간의 소리에 의한

노래이고 악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소수 집단이고 또

때로는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전례를 행할 때 유대교가 성전의 전례에서

사용했던 악기를 쓸 수 없었다. 한 편 신자들이 알고 있던 악기, 즉 종교 의식에서

사용된 악기는 주로 이교 의식에 쓰였던 것이었다. 그것은 시끄러운 음악이고

'영과 진리에 의한' 의식, 하느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위한 의식에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악기는 어떤 이교의 신을 예배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므로 당연히 그리스도교의 의식에서 제외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는 전례의 기도에서 악기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하느님이 바라셨던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교회는 오래지 않아

전례 기도의 특징이 어떠한 것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안 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내면적이며 정신적인 것으로서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위대하고 강력한 말씀이고 우리가 쓰는 평범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장엄하게 외워야 할 것이고 노래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하느님 말씀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느님 교회 안에서 전해져야 하고 신자 모두의

찬미로써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노래는 교회의 생활과

신자 모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J. A. Jungmann, "Musique Sacrfe et

Reforme Liturgique", in Le chant liturgique apres V atican Ⅱ, Pairs 1966, p.

19-20.)

 

 

전례 헌장 l12b에는 교부들이 성음악을 찬양했다고 말하고 있다. 성아타나

시우스(5.Athanasius, 295-373)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편에 곡을 붙여

낭송할 때 그것은 음악의 감각적인 기쁨을 노래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의 조화를 나타낸다. 우리는 선율을 붙여 성구를 낭송할 때 그로 인해 자신의

차분한 생각이나 마음의 평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Ep, ad Marcellinum : PG 27,

41.) 또 성요한 크리소스토모스(S. loannes Chrysostomus, 347-407)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가난해서 책을 살 수 없을 때, 혹은 또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때 성당에서 외운 시편 말씀을 반복해서 노래하라. 그것도 한 번이나

두 번이나 세 번뿐 아니라 하고 싶은 대로 몇 번이고 노래하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그로 인해 커다란 힘을 얻을 것이다. (Hom. in Ps. 41 ; PG 55, 163-167.)

레메시아나의 성니체타스(S. Nicetas Remesiana, 335-414)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마음 속으로만 노래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마음 속으로

하느님을 묵상하는 것은 항상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진리에 따라

생각한 결과,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들을 찬양한다. (De Psalmodiae

bono, ed. J. H. Turner, Jouranal of Theological Studies 23(1923), 225-252) 또

성아우구스티누스(S. Augustinus, 354-430)는 이와 같이 말했다." 나는 한번

잃었던 신앙을 막 회복했을 무렵 교회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린 일을 기억한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선율보다도 노래에 붙어 있는 말씀을 듣고 감동한다. 그와

같은 말씀을 맑은 목소리로 알맞게 선율을 붙여 노래하면 나는 교회의 노래가

얼마나 유용한가를 다시금 인식한다. (Confessiones, X, 33 : PL 32, 800.) 회심의

도상에 있었던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 성당에서 자주 전례 의식에 참여했다.

여기서는 노래가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암 브로시오(S. Ambrosius, 340-397)는 시편 노래뿐 아니라 동방 교회의

관습에 따라 찬가를 만들어 이를 노래부르게 했다. 이는 신자들이 의식 중에 계속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Confessiones : PL 32, 770 ; PL 14,

924-925.) "고대에 신자들은 노래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교회는

노래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당연히 신자들도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리고

적어도 신자들이 노래할 경우 아무래도 어느 정도 단순한 노래여야 했기에

신자들이 부를 노래만을 위해 단순화되었다. 노래는 일부러 단순하게 만들었다.

즉 노래는 모두 '하나의 소리(unavoce)'처럼 노래한다는 이상 때문에

단순화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마치 하나의 입, 하나의 소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일치해서 노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실제로 성아다나시우스도 강조하고 있듯이

이와 같이 기도하고 노래한다면 그로써 신자들은 한 마음, 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고 이와 같은 기도나 노래는 하느님께서 더욱 기쁘게 받아들이신다. 그와

동시에 교회의 교부들이 자주 반복해서 말했듯이, 마음을 하나로 하여 소리를

내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일치를 강화하고 그리스도적 사랑을 육성하는

것이 된다. (J. A. Jungmann, op. cit., pp. 21-22) 3) 교황들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

헌장 l12b에서 로마 교황들도 또한 전례 음악의 발달에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공의회는 특히 성비오 10세의 이름을 들고 있다.  1세기말에

로마의 성클레멘스(S. Clemens, 1, 88-97)는 95년경 희랍어로 쓴 고린토 인에게

보내는 서간 가운데서 (Epist. ad 책., cap. 49-51, ed. Funck, tubingen 1887, pp.

135f ; H. Hemmer, Les Peres Apostoliques, t. Ⅱ, clement de Rome, Paris 1926

참조.) 두 가지 규칙을 말하고 있다. 그 하나는 전례 의식 안에서 부르는 노래를

더욱 성대하게 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음악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교회

이외의 장소에서 시편이나 찬가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클레멘스의 이

말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성이레네 우스(S. Ireneus, 130-208)도 인정하고 있듯이

(Adv. Haereses, Ⅲ, 3.) 성클레멘스가 고린토 인에게 말만 것은 자신이 직접

이어받은 '사도들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성클레멘스는 이 서간 안에서 당시

만들어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서의 노래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데 유효하고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의 찬가를 이국에서 즉 '이교의 축제에서' 노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S. Clemens I, epist. Ⅱ. ad Virgines : PG Ⅰ, 432-434)

성클레멘스 시대로부터 4세기까지 교황 문서에는 전례의 노래에 대해 언급한

것은 없다. 실제로 1세기부터 3세기 사이 교회의 교부나 주교들은 그리스 도교의

정신에 따라 신자들을 위하는 것만 생각해 각자 자신이 사는 장소에서

지도하거나 전례 규칙을 성하거나 했던 것이다. 밀라노 칙령(313)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교회에 평화와 자유가 주어져 그 이후 그리스도교가

예배를 행하거나 그 신앙을 넓히는 데 아무런 장애 도 없게 되었다. 신자들은

집회를 위해 큰 장소를 쓸 수 있게 되고 거기에서 행하는 전례 의식은 더욱

풍요한 것이 되고 또 음악도 더한층 발전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음악은

단순히 생존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것은 더욱 조직화되어

발달해야 했다. 루치우스, 셉티무스, 세베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Lucius,

Septlmus, Severius, Aurelius, Antoninus, 193-211) 황제로부터

막시미누스(Galerius, Valerius, Maximinus, 308-313) 황제에 이르는 기간에 몇

사람의 로마인이 선임되어, 그때부터 로마식 전례 미사의 줄거리가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전례의 노래는 이 형식에 맞도록 만들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이고 통일된 전례를 참으로 만들어 낸 것은 로마 교황 다마수스(Damasus

1, 366-384)라고 말하고 있다. (J. Chailley, op. cit., p. 39) 성음악의 예술적 발달에

대해서는 신자의 전례 참여의 문제를 논할 때 언급하겠다.  

 

「역대교황문서집」(Liber Pontificalis))에 의하면 5세기의 교황들은 전례의

노래에 관한 규칙을 만들고 있었으나 이 규칙은 성그레고리우스 1세(S. Gregorius

1, 590-604)에 가까워지면서 완성되었다. 성첼레스티누스 1세(S. Coelestinus Ⅰ,

422-432)는 "미사 앞에 15편의 시편을 낭송할 것을 명했으나 (Liber Pontificalis,

ed. Duchesne, t. Ⅰ, p. 238.) 이와 같은 것은 이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성레오 1세(S. Leo Ⅰ, 440-461)는 "1년분의 전례 성가책을 정했다.

(deprondio Monach. : PL 138, 1347) 이 개혁은 교회의 노래에 헤 아릴 수 없는

영향을 주었다. 즉 이때부터 1년간 교회 안에서 부를 노래의 가사가 결정되어

사제는 노래부르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전례의 노래는 5세기 초부터 7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라틴 전례와 더불어 발달했다. 이때에 와서 비로소 로마 교황은

성무일도서에 따라 1년 동안 매일 노래를 부를 것을 명했다. 이 규칙을 정하는 데

있어 전례를 통일하려는 배려가 있었던 것 같다. 성그레고리우스 1세에 의해 전례

성가의 개혁이 이루어지는 150 년경 전부터 그 대강을 정하고, 이후 150년간

성그레고리우스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례 노래의 통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성레오 1세나 성그레고리우스 외에 4인의 교황, 즉 젤라시우스 1세(Gelasius Ⅰ,

492-496), 심마쿠스 (Symmacus, 498-514), 요한 1세(loannes Ⅰ, 523-526),

보니파시우스 2세 (Bonifatius Ⅱ, 530-532)가 1년간 부를 전례 성가책을 완성했다.  

 

성그레고리우스 1세는 중세 전체에서 탁월한 인물이었다. 성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기존 성음악을 편집하고 옛 선율을 전례를 위해 편곡하고 수정해 성가대를

만들어 전례의 노래를 조직적으로 부르게 했는데, 이야말로 전례의 노래 에 관한

그의 주요한 업적이고 그때문에 교회의 노래는 그 이름을 취해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르고 있다.  "교통편이 나빠, 소수의 주교나 사제의 판단으로 일을

행했던 시대에서는 성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이 모든 교회에서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아직 200년 정도 기다려야만 했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작곡된 양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적어졌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면서 움직이고 있는 기계처럼 교회는 7세기와

8세기 에 점점 속도를 줄이면서 그레고리오 성가가 만들어졌으나, 9세기가 되면서

그것을 만드는 것을 전적으로 중지하고 말았다. 그래도 특히 13세기와 15세기에서

Kyrie(불쌍히 여기소서의 찬가), Sanctus(감사의 찬가)나 Agnus(평화 의 찬가)와

같은 미사 통상문에 멋진 선율이 붙여져 그 모습을 새롭게 하는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항상 변화하지 않는 가사에 작곡자는 새로운 선율을 붙였던 것이다. (J.

Chailley, op. cit., pp. 50-51) 성그레고리우스 1세의 뒤를 이은 교황들 예컨대

데우스데디트(Deusdedit, 615-618)나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Ⅰ, 625-638)는

거의 모두가 옛 성가 대에서 노래했던 사람들이었다. 레오 2세(Leo Ⅱ, 682-683)

및 베네딕투스 2세(Benedictus Ⅱ,684-685)가 쓴 전기에 의하면, 이 두 교황은

로마의 전례 성가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선대의 교황들

특히 성그레고리우스 1세의 업적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교황 레오

4세(Leo Ⅳ, 847-855)의 교서 「우나 레스」(Una Res)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교서에서 교황은 부를 노래와 부르지 못할 노래에 대해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이 교서를 본다면 당시의 교황들에게는 로마식 전례로 통일하는 것이

신앙의 통일과 같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그레고리우스 이후의

교황들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새로운 가사를 많이 만들어 여기에 새로운 선율로

붙였을 뿐 아니라, 새로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들에게

성그레고리우스가 정한 전례 원칙을 표현하고 확장해서 만든 규칙을 보급했다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불리는 전례 성가를 보급하는 데 있어 성베네딕토가 설립한

수도회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선교사나 수도자는 성베네딕토의

fegujo(규칙서)에 따라 생활했는데, 이 규칙서에는 전례 의식이나 노래에 관한

규칙이 씌어 있어 교화 안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세속적인 권력도 전례

성가를 보급하는 데 힘을 다했다 세속의 권력은 교회에 협력하고 교회의 법을

만드는 것을 지원하고 특히 로마식 전례나 그레고리오 성가가 더욱 정확하게

되고 권위를 세워 다른 전례 의식을 대신하게 되었다. 754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Ⅱ, 752-757)는 롬바르디아인에게 위협받고, 또 동로마 제국의

무력한 황제에게 버림받아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왕 페팽(Pepln le Bref,

714-768)을 축성하러 갔다. 그리하여 페팽이 로마와 교황좌를 위협하고 있는

롬바르디아인의 위협에서 자신을 수호하기를 원했다. 한편 프랑스를 떠날 때

교황은 페팽에게 로마의 학자를 남겨 두어 그들에게 로마의 전례 성가를 프랑크

왕국 내에서 가르치게 했다. 이때부터 페팽은 갈리아의 전례를 폐지하고 로마의

전례를 채용할 것을 법령으로 정했다. 페팽의 아들 샤를 대제(Charlemagne,

742-814)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대한 영예를 가진 나의

아버지 페팽은 갈리아의 전례를 폐지하고 로마 교회와 일치해 하느님의 교회

안에 평화로운 영혼의 일치를 확립하려고 했다. (Capitul. n. 22, in Monumenta

Germ. His.,ed Krause, t. Ⅰ, p. 61.) 샤이에(J. Chailley)는 자기 나라 전례의

노래를 폐지하고, 로마 전례의 노래를 채용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례에 여러 가지 양식이 있는 것은 새로 통일된 국가에게는 분열을 야기하는

끊임없는 위협이었다. 사실 샤를 대제는 성그레고리우스의 참다운 후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가 정신적 통일을 위해 행한 성음악의 통일은

샤를 대제에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부조화한 제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하는 데는 아무래도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통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J. Chailley, op. cit., pp. 56f.) 샤를 대제의 업적에는 많은 좋은 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그는 전례 성가에 일반 신자가 참여하도록 격려했다. 그러나 이

일을 권력을 써서 강제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샤를 대제는 교회의 노래에

순수성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일반 음악도 순수한 것이어야만 한다고 했다. "샤를

대제의 위엄에 굴복하고 그 권력을 두려워해" (J. Chailley, op. cit., p. 57) 당시의

음악가들은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진보하지 못했다. 샤를 대제의 사후(814)

다시 많은 음악가들이 나왔으나 그 작품에는 규율과 권위가 없었으므로 이후

중세에 와서 극단적인 오류가 생겼다.  이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발명, 즉

트로프(trope) (트로프(trope)란 전례 노래의 가사에 몇 가지의 말을 삽입하거나

첨가해서 그것 을 장식하는 덧이다. 트로프는 9세기 말경부터 전례 성가 안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키리에나 알렐루야에 긴 모음을 붙여 노래할 때에 이 모음에

말을 붙여 선율 을 외우기 쉽게 했다. 예컨대 Kyrie, Deus, sempiterne, vita

vivens in to, eleison과 같이, Kyrie와 eleison 사이에 다른 말이 삽입된 것이다.

다음으로 이 트로프는 전후의 말에서 떨어져 독립한 곡이 되었다. 그리고

10세기부터 11세기 경에는 이와 같이 해서 만들어진 곡을 본받아 많은 서정적인

곡이 만들어졌다. 그 후 트로프는 과도히 쓰였기 때문에 평판이 나빠져 결국

트렌트 공의회(1545 -1563)에 의해 그 사용을 결정적으로 금지당했다. 그러나

트로프는 음악이나 문학의 역사 안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트로프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작곡하지 않게 된 무렵에 전례 성가의 작곡을 적극적으로 자극하고, 또

문학 면에서 여러 가지 형식을 낳게 했다.) 나 다성 음악이나 네우마(Neuma)

(희랍어의 pneuma(숨결)에서 유래된 말로서, 처음에는 한숨으로 발음된 '말'이나

한숨으로 노래한 악절을 의미했다. 네우마는 특히 그레고리오 성가에서는 성가의

짧고 전형적인 선율을 나타냈다. 다음으로 더욱 발전하면 멜리스마(melisma), 즉

한 음절 위에 하나의 음표를 붙여 노래하는 대신에 몇 개 음의 그룹을 붙여

노래하는 것을 가리켰다. 가장 간단한 멜리스마는 클리비스(clivls)나

포다투스(podatus)의 두 가지 음절로 되어 있다. 그러나 멜리스마는 흔히 셋이나

넷 혹은 다섯의 음표로 되어 있는 일이 있다. 그 이후 9세기부터 12세기경에

네우마는 원시적 음표의 기호를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에 의한 기법은 문자

그대로 음악을 바꾸어 이제까지 몰랐던 가능성을 음악에 가져왔으므로 이들은

다성 음악 특히 성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1세기 이래 교황들은 기도를

방해하는 많은 제멋대로 된 노래를 금지 하려고 했다.  트렌트 공의회 종료 1년

후에 비오 4세(Pius Ⅳ, 1559-1565)는 1564년 8 월 2일자 자의교서로써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공의회의 교령과 지침이 올바로 적용되도록

감시하는 일이었다. 위원회는 즉시 어떤 종류의 미사곡 즉 일반 사람, 더욱이

종교에 전혀 이해가 없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 전례와 관계없는 말이

혼합되어 있는 미사곡이나 가사곡을 모두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또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가 전례 성가를 듣고 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래할 것을

요구했다. 이상이 이 위원회에 의해 정해진 규정이고, 그 목적은 로마 전례를

지키고 또한 전례에 다성 음악의 사용이 인정되게 되었으므로 이 음악을

순화하는 일이었다.  교회 안에서 이 규정을 실제로 적용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교의를 가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출현하고 또

르네상스가 고대 예술의 흐름에 E른 음악을 만들어 내, 각자의 영역 내에서

사람들의 영혼 안에 있는 신앙과 도덕을 약화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의 혁명적

정신과 르네상스의 이교적 정신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르네상스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순수성을 심하게 손상시킨 것이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Ⅷ, 1623-1644) 재위 중에 예부성성은 교령을 반포해 음악가들이 그

작품을 느끼기 좋도록 하기 위해 성서의 말씀을 너무나 쉽게 바꾸었으므로

"그것은 이미 성서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를 이용한 음악이 되어

버렸다." (예부성성 Decr. Auth., (1643년 2월 21일), n. 823.)라고 말했다. 교령에

의하면 제 2의 불편한 점은 "장엄 미사이다. 장엄 미사는 부당하게도 음악회처럼

되었으므로 전심 전력을 다해 미사를 드려야만 하는 사제는 음악 때문에 분심

상태가 되고 거기다가 의식의 질서가 혼란하게 된다. 이래서는 음악이 미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미사가 음악을 위해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예부성성 decr. auth., (1643년 2월 21일), n. 823.) 그러나 이와 같은 불행한

상태는 쉽게 개혁되지 않았다. 각지로부터의 불평이 로마에 집중되어 교회의

교의를 법령에 의해 분명히 정할 것을 교황에게 요구했다. 알렉산데르 7세

(Alexander Ⅶ, 1655-1667)는 1657년 4월 23일 마침내 「Piae sollicitudinis

studio」란 제목의 헌장을 반포했다. 이 문서에는 전례 성가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수호하려는 교황의 단호한 의지가 나타나 있다. 이 헌장은 그 내용이

확 실하고 엄격한 것으로 그 후 전례 성가 분야에 크게 공헌했다. (Bullarium

Magnum Romanorum, t. Ⅹ Ⅵ, p. 275.) 18세기에 교회가 낸 전례 성가에 관한

문서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749년 2월 19일에 반포한 회칙 「Annus

Qui」로서 그 내용은 "교회의 장식과 미관에 대해 또 전례의 의식 문제 및

성음악의 문제에 대해" (Id., t. ⅩⅤⅢ, pp. 9-10.)이다. 여기서는 음악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지만 성음악에 대한 모든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회칙은 150년 후에 나온 성비오 10세의 자의교서와 같이 그 시대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이 회칙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의 대부분이 1917년 교회법에 서 다시 다루어져 완성되었다.

 

이 회칙의 목적은 전례 의식을 조직화하고 모든 오류, 즉 "성음악의 순수성을

손상하고 그 결과 신자의 영혼을 교화하기보다 는 오히려 이것을 좌절시키는"

(Id., t. ⅩⅤⅢ, pp. 9-10.) 오류를 배제하는 일이다. 베네딕투스 14세의 회칙은

성이시도루스의 다음 말의 반향이다. "노래는 신자의 영혼을 감동시켜 신심으로

인도하고 또 성스러운 사랑의 감정을 나게 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Isidorus, De Eccl. Off., I, 71 : PL 82, 743.) 그러나 교회가 전례의

기도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행한 개혁은 이로써 끝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법규로써 결함이나 오류를 바르게 하고 위반을 고치고 신자의 영혼에 해롭고

전례 의식에 합당치 않은 지나침을 일소해 교회에 가장 도움이 되는 형식을

쓰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솔렘 수도원에서 전례를

부흥하려는 강력한 운동이 일어났다. 게랑제 신부(Dom Prosper Gufranger,

1805-1875)의 지도에 의해 베네딕토회의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수도원에서

성무일도를 노래로 다시 훌륭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게랑제 신부가 만든 「전례

연중의 해설」(Annee Liturgique)의 덕택으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전례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영적 부를 관상 할 수 있게 되었다. (H.Schmidt,

constitution de la Sainte Liturgie, Editions Lumen Bitae 1966, p. 50.) 신자들도

또한 성음악의 현상에 불안을 느껴 각지에서 이를 바르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 선의의 노력이 19세기 말경의 모든 나쁜 취미를 추방한 것 은 아니다.

 

1900년에 『양세계 평론』(La Revue des Deux Mondes)의 음악 기자 카뮤

베레그(Camille Bellaigue)는 다음과 같은 엄격하고 적의에 찬 문장을 썼다."교회

성당 안에서 행해지는 것은 오페라의 무대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는 무대 위에서도 또 성당의 제대 위에서도 잘 맞는 노래,

때로는 똑같은 노래가 불려지고 있다. … 미사의 Agnus Dei (평화의 찬가)는

파우스트의 지옥벌 중에 사랑하는 아리아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의

선율로 노래하고 있다. … 관 옆에서의 기도는 지금 막 죽은 아람을 위한 최후의

연주회나 오페라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Daniel Rops, Histoire dell; Eglise, t.

Ⅶ(Editions Bernard Grasset), p. 284.) 전례와 전례 성가와는 그 성질상 서로

보충해서 원칙적으로 일치된 것이 되어야 할 것인데, 20세기 처음에는 서로

따로따로 독립되어 있었다. 전례나 전례 성가나 각자 훌륭한 전통을 갖고

있었으나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었다. 성 비오 10세는 교황이 되기(1903년 8월

4일) 얼마 전에 이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교구인 베네치아의 신자들에게 주교

서간(1895년 5월 1일)을 보냈다. (Lettera pastorale sulla Musica sacra

dell'Eminentissimo Card. Giuseppe Sarto, Patriarcato, Roma 1904.) 성 비오

10세는 1903년 11월 22일에 자의교서 「Tra le Sollecitudini」를 반포했으나 이는

전례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황은 로마식 전례에서의 음악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바랐던 것이다. "왜 이 자의교서는 고전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성비오 10세가 교회 음악이 전례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그리스도교의 전례 의식의 본질에 관해 뛰어난

원리를 발표했다. 그는 음악도 전례도 다 하느님 백성 공통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바꾸어 말하면 성음악은 단순히 성직자나 수도자나 음악 전문가의 관심이 아니라

전적으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H.Schmidt, op. cit., p. 50.)

 

성비오 10세가 전례 음악의 부흥 운동을 일으컸을 때, 전례를 부흥하려는

사람들이 먼저 주목한 것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먼 저

옛 성가의 문헌에 따라 교회의 전통적인 노래를 종합하는 데 올바른 선율을

발견할 필요가 있었다. 한번 본래의 선율이 보전된다면 이것이 상실되지 않도록

온전히 보전해야만 했다. 또 선율을 노래할 경우 전통적 규칙을 될 수 있는 대로

재현하고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진실로 이와 같은 것에 대해 솔렘 수도원은 이미

50년간 노력해 왔던 것이다. 확실히 성비오 10세의 자의교서는 솔렘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그레고리오 성가의 연구를 계속케 하는 자극이 되었다. 이 자의교서

안에는 '옛날에 그러했듯이' 신자들을 위해 다시 옛 그레고리오 성가를 사용하는

것이 예견되고 있었다.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ⅩⅤ, 1914-1922)는 성비오

10세가 시작한 전례 부흥의 사업을 열심히 계승해 먼저 교황령 (AAS 7 (1915),

pp. 319ff.)을 발표해 그 가운데 주송자의 전례에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런

첨에서 그는 성비오 10세가 자의교서에서 말한 "주송자는 참으로 전례적 역할을

수행한다." 라는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1917년의 성령 강림 대축일 베네딕토

15세는 「교회 법전」을 반포했는데 그 1264조 제 1절에 교회의 전통이 요약되어

있다. "불순하고 선정적인 내용의 음악은 오르간용이든 다른 악기나 노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든 교회에서 단호히 추방되어야 한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성음악에

관한 전례 규정을 지켜야 한다." 비오 11세(Pius ?, 1922-1939)는 1922년 11월

22일 자의교서를 반포해 (AAS 14(1922), p. 623.) 로마에 교황청 성음악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에 대해 비오 10세가 말한 말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전례 성음악의

부흥과 교육을 위해 이 연구소를 강화하려고 했다. 다음으로 1928년 12월 20일

비오 11세는 교황령 「Divini cultus」를 (AAS 20(1928), pp. 138ff.) 반포했다.

성비오 10세의 자의교서 반포 25주년에 즈음해 선임 교황이 정한 것을

재인식하고 성비오 10세의 생각이나 입법에 따라 새로운 규정을 확정했다. 성비오

10세의 개혁 덕택으로 음악의 아름다움에 접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의

종교심은 다시 눈을 뜨고 전례의 중심으로 인도되어 더욱 적극적으로 전례

의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비오 12세(Pius ?, 1939-1958)는 1955년 반포한

훌륭한 회칙 「Musicae Sacrae Disciplina」의 첫머리에서, 성비오 10세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선임 교황 성비오 10세는 고대로부터 이어받은

성음악의 원리나 규칙을 상기하고 이들 원리나 규칙을 현대 사정에 맞도록

적당히 종합해 전례 전체 특히 성음악의 부흥을 이룩했다." 「Musicae Sacrae

Disciplina」는 미학적이고 기술적인 규칙을 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목적

성격이 각 페이지에 넘치고 있다. 비오 12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성음악이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사명을 유효하게 수행하는 일이다. 성음악을 진흥하고

발달시키는 모든 일, 즉 작곡이나 연주나 연구도 모두 선교라고 주저없이 말하고

있다. 비오 12 세의 회칙에 대해 앙글레(Monsignore Angles)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부 시대의 노래 특히 9세기 이후 비오 12세처럼 음악에 뛰어난

이해를 가진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 비오 12세는 그 회칙으로써 주교 회의의

'요청 에 응답하기를 바라고' 또 '뛰어난 음악가나 유명한 음악 학자가 학회에서

낸 결론에' 응답하려고 했다. 여기서 선임 교황들이 반포한 현재 유효한 규칙을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를 승인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비오 10세가 자의교서 안에서 정한 규칙은 '성음악의 법전'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나 이 규칙이 더욱 분명히 표현되고 더욱 현실 사정에 합당한 것이 된다면

더욱 알차게 적용되고 지켜질 것이다." (Bollettino degli Amici del Pontificio

Instituto di Musica Sacra, An. Ⅷ., n. 2, giugno 1956, p. 8.) 요한 23세(loannes

ⅩⅩⅢ, 1958-1963)와 더불어 교회는 새로운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그에 의해

말하자면 교회는 현대 세계와 동일 시점에 서게 되고 현대 사회의 요구에

응답하게 되었다. 요한 23세에 있어 전례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요한

23세는 전례를 제일로 생각하고 다음으로 전통을 존중해 현대의 요구에

응답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공의회의 전례 헌장에

반영되어 있다.  전례 헌장 112조는 "현대에 있어서는 성비오 10세를 비롯한 로마

교황들도 의식에 있어 성음악의 봉사적 임무를 뚜렷이 밝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1643년 우르바누스 8세 시대에 예부성성은 음악이 전례에서

점점 독립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으나 같은 교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음악이 미사에 봉사하는 것이지, 미사가 음악에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예부성성 Decr. Auth., n. 823.)

 

성비오 10세는 자의교서 안에서 당시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음악가들에 대해

음악은 전례의 '겸손한 종(umile ancilla)'이라고 말하고 있다. (Tra le

sollecitudini, n. 23.) 그 후 전례 부흥의 움직임이 일시 정체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비오 11세는 음악을 '훌륭한 종' (Divini Cultus p. 4.)이라고 규정하고, 또

비오 12세는 '음악은 전례의 조수와 같은 것 (quasi administra)'이라고 말했다.

(Musicae Sacrae Disciplina, n. 27.) 그런데 전례 헌장은 '봉사적 역할(munus

ministeriale)'이란 말을 사용해 음악이 전례 안에서 수행하는 적극적 역할,

실용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는 성 비오 10세의 자의교서보다도 더욱

큰 독립성이 음악에 부여되고 있으나 음악이 갖는 책임을 분별할 필요가 있음도

요구하고 있다. 노래나 오르간 곡을 다만 그것이 전통적이라거나, 혹은 미사란

명칭이 붙어 있기 때문이란 이유로 고르는 것은 좋지 않다. 그 곡이 "전례문과

의식은 그것이 뜻하는 거룩한 것을 더 명백히 표현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것을 되도록 쉽게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또한 공동적인 식전답게 완전히 참여할

수 있는가" (전례 21조)의 여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곡조의 전례적 가치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말하고 있는 규준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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