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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문화산책: 성음악 (11) 교회 음악 쇠퇴와 쇄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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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24 조회수3,960 추천수0

[가톨릭 문화산책] <52> 성음악 (11) 교회 음악 쇠퇴와 쇄신운동


낭만주의에 흔들린 교회음악, 재건 노력 이어져



음악형식이 최고조로 발달한 고전음악 시대의 끝자락에 있던 베토벤은 말년에는 자신의 음악적 감성을 표현하는 데 음악형식이 방해가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형식을 파괴하고, 느낌을 따라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이 놀라 거부감을 표시할 정도의 불협화음 사용과 갑작스런 조바꿈 등 이 시대의 반항아는 다음 시대의 문을 여는 역할을 했다. 마침 사회도 급변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서민 출신의 신흥 재벌들이 사회의 막강한 계급으로 떠오르며 기존 귀족계급이 흔들렸다. 당연히 교회의 사회 통제력도 매우 약해졌다. 신흥계급이 음악을 즐기면서 이제 음악가들은 교회의 육성이 없어도 무대 연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음악가들은 너도나도 자신의 감성에 충실하고 자유롭게 작곡 활동을 했는데, 이 시대를 낭만주의 시대라고 하며 대개 1820년에서 1900년 사이를 말한다.

게랑제 수사.


감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표현 수단이 풍부해야 한다. 그 수단으로는 협화음의 울타리를 벗어난 불협화음, 다수의 유능한 독창자들, 대규모 합창단, 다양한 악기를 가진 대규모 오케스트라, 넉넉한 연주 시간 등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베토벤의 제 9번 교향곡 '합창' 이후 작곡가들은 너도나도 대규모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말러는 1000여 명의 연주자가 필요한 '천의 교향곡'까지도 썼다. 교회음악곡을 쓰더라도 역시 대규모 합창단과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그것도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곡들을 쓰는 것이 예사였다. 장르로는 대형 오라토리오와 레퀴엠(Requiem, 위령미사곡)이 많이 작곡됐다. 멘델스존(F. Mendelssohn)의 '엘리야'와 '성 바오로', 베를리오즈(H. L. Berlioz)의 '예수의 어린 시절' 같은 대형 오라토리오와 레퀴엠과 사은찬미가(Te Deum), 베르디(G. Verdi)의 레퀴엠, 브람스(J. Brahms)의 독일 레퀴엠, 포레(G. Faure)의 레퀴엠, 로시니(G. Rossini)의 '통고의 성모(Stabat Mater)', 리스트(F. Liszt)의 장엄미사곡과 헝가리 대관 미사곡 등이 발표됐다. 리스트의 오라토리오 '성녀 엘리사벳의 전설'은 연주 시간이 4시간 정도 소요되기도 했다. 흡사 성직자처럼 살던 브루크너(A. Bruckner)도 대형 미사곡들과 사은찬미가를 썼다. 구노(Ch. Gounod)의 성녀 체칠리아 장엄 미사곡은 지금도 자주 연주된다.

물론 브루크너의 곡처럼 무반주 합창의 모테트들도 나오지만 그 역시 대규모 합창단이 있어야 표현이 잘 되는 곡들이었다. 이러다 보니 미사는 한없이 길어지고, 전례와 전례음악의 주객전도 현상이 나타나게 됐다. 교회 재정도 이를 뒷받침하기엔 벅찼다. 이에 반작용으로 교회 음악계에서 정화 운동이 일어났는데, 프랑스 솔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그레고리오 성가 부흥 운동'과 독일어권에서 시작된 '체칠리아 협회' 운동이 그것이다.


그레고리오 성가 부흥운동
 
삼중악보. 솔렘에서 발간한 Graduale Triplex에 실린 악보로서 성령 강림 대축일 입당송이다.


프랑스 르망 교구에 있는 한 작은 마을 솔렘(Solesmes)은 19세기 이래로 그레고리오 성가 부흥 운동의 출발점이 된 베네딕도회 수도원인 성 베드로 수도원으로 인해 유명하다. 우리는 얼핏 그레고리오 성가의 이론과 실제가 역사 안에 부단히 전수돼 온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도 역시 단절됐다가 솔렘 수도원 덕분에 재생됐다.

본시 이 수도원은 1010년에 세워졌다. 여러 역사적인 우여곡절 끝에 게랑제(P. Gueranger)가 수도원을 재건하고 초대 수도원장(1837~1875)을 지내면서 비로소 새로운 솔렘 역사가 시작된다. 게랑제는 복고적인 완벽한 수도생활을 복원하려고 애썼다. 또 수도생활의 전통적 형태의 복원은 성무일도(시간전례)의 개혁과 재건을 통해 가능하고, 이것은 또 성무일도를 노래하는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의 출판 사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수도원에 편찬실을 두어 오래된 최고의 수사본들을 서로 비교해 가면서 새로운 권위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를 만들어내게 했다. 또 낭송적 리듬이론 즉 '그레고리오 성가의 리듬은 절대로 라틴어 가사의 리듬에 준해야 한다'는 이론을 세웠다. 수사 조지옹(Dom Jausion)은 13세기에 사용되던 사각음표를 본 따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를 만들었다. 또 수사 포티에(Dom Pothier)와 함께 그레고리오 성가 교과서를 만들면서 "모든 음표는 같은 길이를 갖는다"는 동가론(同價論)을 주창했다.

마침 교황 비오 10세는 성음악에 관한 규정인 자의교서(Motu proprio)를 내면서 바티칸 판 그레고리오 성가책(1908)을 출판하는데, 여기서 솔렘 악파도 함께 참여했다. 후에 머크로(A. Mocquereau)가 등장해 음악 기호학(Paleographie musicale)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새로운 리듬이론을 제시했다. 음표를 둘 혹은 셋씩 묶어 한 리듬 단위를 정하자는 맥동이론(Ictus theory)이 그것이다. 이 이론은 현재 더 이상 호응을 받지 못한다. 이 운동은 체칠리아 협회와 서로 도우며 그레고리오 성가를 다시 살려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체칠리아 운동

성음악의 수호성인 성녀 체칠리아.


성음악의 수호성인인 성녀 체칠리아의 이름에서 유래한 체칠리아 운동은 19세기에 제기된 가톨릭 전례음악의 개혁운동인데, 그 근원은 모호하다. 이미 18세기 초에 비엔나나 독일 파사우(Passau)에 이런 이름의 모임이 있었고, 뮌헨에서는 반주가 붙어 있는 교회음악을 무반주 음악으로 정화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교회음악의 비중을 무반주 음악이나 그레고리오 성가에 크게 두는 이들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 많아졌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각국에서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고 그들의 이상형은 팔레스트리나였다. 여기에 때를 맞춰서 솔렘 수도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다.

이런 두 배경이 서로 상승 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전례운동이 일어나는데, 프랑스에서는 게랑제(P. Gueranger)를 통해, 독일에서는 레겐스부르크의 주교 자일러(Sailer)와 쾰른의 가이셀(von Geissel) 추기경, 브레슬라우의 디펜브록(Diepenbrock) 추기경을 통해, 그리고 1848년에 개최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회의를 통해 추진됐다.

이런 교회음악 개혁 운동은 작은 지방에서는 별 영향력이 없어 전반적인 교회음악 개혁은 멀어 보였다. 이 때 빗트(F. X. Witt)는 교회음악 잡지인 「가톨릭 교회음악의 비행전단(Fliegende Blaetter, 1866)」과 「성음악(Musica sacra, 1868)」을 통해 민중들에게 교회음악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드디어 1868년에 밤베르크에서 열렸던 가톨릭의 날에 독일어권을 위한 체칠리아 운동 총연합(ACV)을 세웠다. 교황 비오 9세는 1870년 소교서(Multum ad commovendos animos)를 통해 이 기구를 공식으로 인준했다. 이 조직의 빠른 전파와 타격력은 작은 동네들까지를 포함하는 전 독일에 교회음악 개혁운동을 효과적으로 확산시켰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신에 따른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엔 부정적인 결과도 나타났는데, 무반주 다성음악과 그레고리오 성가만을 교회음악의 이상으로 강조하고, 또 동조자들의 곡이면 무조건 홍보 명단에 올리는 등 경직성이 뒤따랐다. 이에 하버트(J. Ev. Habert) 등은 오스트리아에서 ACV에 맞서, 예술적으로 관대해야 한다는 하나의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이에 베네딕도 수도원의 마이어호퍼(I. Mayerhofer)와 키인레(A. Kienle) 등은 양극단 사이를 중재하면서 교회음악에 있어서 '중용과 관대'를 요구했다.

이런 내부 논쟁과 또 외부에서 오는 도전에도 이 체칠리아 운동은 독일의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 혹은 협회라는 조직을 통해, 혹은 회보 발간을 통해, 혹은 음악학교인 스콜라 칸토룸과 교육기관들의 설립을 통해 퍼져나갔다.

그러나 진짜 큰 어려움은 이 운동이 동시대의 음악 발전에 대해 매우 폐쇄적이었다는 점이다. 부르크너나 라인베르거(J. Rheinberger) 등 당대의 대가들의 작품조차 수용하지 못한 송사리들의 모임이었다. 차차 체칠리아 운동은 그 엄격한 방향을 잃고 일반적인 교회음악운동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교황청의 여러 교회음악 규정들에 그 정신이 스며들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에도 역시 체칠리아 운동의 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평화신문, 2014년 2월 23일, 백남용 신부(서울대교구, 교회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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