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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13주일: 마태오 10, 37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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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3-07-01 조회수342 추천수1 반대(0) 신고

‘칼 필레먼’의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에 보면, 데일 카네기 인생론에서 강조한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 말이 인생의 해답이려니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러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디서든지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모욕의 순간을 겪어보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사람, 장소, 환대」에서 ‘김현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사회는 우리가 잘살건 못 살건 배웠건 못 배웠건 모두 사람으로서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물론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존엄하다고 선언합니다. 그 근본 바탕은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당신 존재와 삶, 말씀과 행동으로 이를 가르치셨고 표현하셨으며 실현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하늘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고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런 말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입니다. 인간의 존엄은 일상의 만남을 통해, 관계를 통한 말과 몸짓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환대입니다. 또 김현경은 그런 사람다운 대접을 절대적 환대라고 강조하면서 환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준다,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따른 권리를 준다, 인정한다는 뜻이다. 또는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들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환대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구성원이 되게 되고,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 환대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hospitality는 ‘우호’로도 번역되는데, 이러한 번역은 통해 이 단어가 우정과 적대와 맺는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표시할 수 있다. 사회가 잠재적인 친교의 공간을 가리킨다고 할 때,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 그를 향한 적대를 거두어들이고 그에게 접근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아직 나의 벗이 아니지만, 언젠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바로 ‘환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왜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인가를 밝혀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당신을 추종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제시하는데, 그 요건이 과히 충격적이고 파격적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10,37) 가족 관계는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고 시발이며,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모든 인간관계의 전부이고 종착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분위기를 풍깁니다. 또한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10,38)고 말합니다. 철저한 자기 포기와 죽음이 동반하지 않은 추종은 허위이며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목숨을 얻기보다 그로 인해 자기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서는 미시적이고 협의적인 이해와 시선이 아니라 거시적이고 광의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파악할 필요가 요구됩니다. 한 문자나 한 문장에 국한해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단락의 전후 맥락에서 바라볼 때 역설적인 메시지, 함축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10,16)는 말씀을 시작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박해를 각오하라’(10,16-25),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10,26-33)는 말씀에 이어, 오늘 말씀이 놓여 있습니다. 또한 따름에 있어서 ‘가족’이 바로 걸림돌이며 원수가 될 수도 있음을 아셨기에, 예수님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10,34)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복음의 이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말씀은 예수님 부활-승천 이후 마태오 복음사가가 복음을 집필한 시기에 초대 교회가 겪었던 당대의 역사적 사건과 사회 상황을 이해할 때 파악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로마의 통치 상황에서 당대의 종교와 전혀 다른,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이단이나 미신’을 신봉한다는 이유에서 겪어야 했던 박해와 몰이해로 말미암아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칼을 주러 왔고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했던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과 충돌, 소외와 버림받음을 복음은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모든 지역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 처음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한국 순교자들 역시 겪었습니다.

혈연적 가족 관계는 인생의 보루이며 디딤돌이 되지만, 지나친 집착과 애착은 오히려 올가미와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집착할 때 발생하는 걱정과 불안, 기대에 따른 실망과 미움은 가족 서로를 파괴하는 치명적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집착에서 벗어나 가족 구성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가족은 훨씬 더 자유롭고 건강하며 안전하고 유기적 공존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양면적인 혈연관계의 벽을 넘어설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가 내 부모이고 형제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부모요 형제이며 자매’라는 영적 가족의 맥락에서 이웃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데코마이’는 ‘환영하다, 인정하다, 인내하고 참아주다’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를 환대하고 존중하며, 그의 모든 것을 인내하고 참아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게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큰 환대로 보상받게 된다고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의 ‘데코마이’, 즉 ‘hospitality 환대’에 동참하도록 초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낯선 곳을 떠돌아다니던 우리를 하느님께서 거둬들이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세상의 힘 없고 철부지와 같은 작은 이들을 환대할 때, 작은 이들은 스스로 보상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보상하실 것임을 복음에서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10,42) 이 약속의 말씀을 예수님은 훗날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이러한 환대와 보상의 전형은 오늘 독서 열왕기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넴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한 여인은 엘리사 예언자가 그 지역을 지날 때마다 자기 집에 모셔 음식을 대접하고 환대합니다. 이는 그녀가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2열왕 4,9)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사람을 환대한 것은 곧 하느님을 환대한 것이 됩니다. 결국 이러한 환대는, 나이 많은 남편과 자식 없이 살고 있던 여인의 임신으로 보상받게 됩니다. “부인은 한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10,16)라는 예언의 말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전제하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받아들이다.>고 하신 말씀의 의도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10,40)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확인해 줍니다. 물론 파견받은 자와 파견하신 분은 다릅니다. 하지만 사도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복음 선포를 돕는 사람은 복음 선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그가 내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10,41~42참조)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집착은 주변의 ‘작은 이들’에게 다가가야 할 우리의 진심과 선의를 무기력하게 하는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을 예수님 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은, 사실 부질없는 집착이나 애착을 넘어서는 넓은 사랑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렬하고 충실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 되고 맙니다. 폐쇄적이기에 치열하고, 치열할수록 맹목적인 가학성을 띨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를 포기하거나 버림을 의미하지 않고 ‘믿음’을 의미합니다. 상대를 믿지 못할 때 불안하고 초조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되고 결국 그런 놓을 수 없음이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믿을 때 자유로울 수 있고 관대하며 유쾌하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결속과 연대라는 구호 아래 자행되는 배타적 집착에서 벗어나 다름과 낯섦을 인정하고 서로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존중하는 환대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아멘”(10,4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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