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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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8-05 | 조회수36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마태 14,1-12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나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어울려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각자가 원하는 것 전부를 실현할 수는 없기에 어지럽게 흩어진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절충과 타협이 필요합니다. 서로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귀기울여서 잘 듣고, 내 욕심만 채우려는 자세에서 벗어나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을 줄도 알며, ‘우리’ 모두를 위해 가장 이상적인게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여, 내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를 위해 최선인 그 길을 찾는 것이 우리가 지녀야할 바람직한 모습인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좋은게 좋은거라는 태도로 세상에 양보하거나,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소극적인 마음으로 한 발 물러섰다가는 나중에 ‘큰 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헤로데 임금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협하고, 체면을 세우기 위해 타협하며,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어서 타협하고,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타협합니다. 그 모든 것이 자기가 직접 선택한 것임에도, 자신도 어쩔 수 없었노라는 핑계 뒤에 숨어 타협이 만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들지요. 하지만 요한은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개인적 욕망은 물론이고 ‘살고 싶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존본능과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국가권력에 타협하여 제 안위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고, 대중들로부터의 인기에 타협하여 자신을 드높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귀기울여 듣고 마음에 받아들이며 무조건 따르고자 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뜻 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나만 잘살면 된다는 개인주의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이기주의에,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한거라는 나태함에, 남들도 다 이 정도는 하고 산다는 자기 합리화에 적당히 타협하며 편안함과 안락함을 누리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다 누군가가 떳떳하지 못해 아픈 내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면 ‘넌 얼마나 잘나고 깨끗하기에 나를 비난하느냐’며 발끈하지는 않습니까? 헤로데는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왕이었지만, 정작 자기 뜻대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여유도, 자신이 반드시 지켜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성찰할 기회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결국 자기가 내뱉은 말에 얽혀들어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는 무거운 죄의식과 깊은 자책 속에서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게 되었지요.
사람의 눈치, 세상의 눈치를 보는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게 당장의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국 그 작은 이익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며 마음 아파할 일로 남게 됩니다. 그러니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를 잘 살피면서 그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느님께로부터 살면서 두고두고 기뻐할 큰 선물들을 받게 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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