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12)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 (로마4,23-5,4) | |||
---|---|---|---|---|
이전글 | 2024 갑진년 [세계 평화의 날] (루카2,15-21) |1| | |||
다음글 |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 [1월 1일]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근본과 더불어 시작하기) |1| | |||
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01 | 조회수20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1. 1. (월요일)
로마서12)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
(로마4,23-5,4) 23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24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를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은 하느님께서 예수 이전의 인류와 예수 이후의 인류를 양분하고 있다 라는 것이 지금 로마서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 이전에는 인류가 하느님 앞에 배반하고 거역하여 스스로 자초한 멸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모두가 그렇다. 예외가 하나도 없다. 그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이 인류를 자기가 자초한 죄와 멸망으로부터 예수 안에서 구원하였다. 이렇게 양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믿음으로 되었다는 것을 자꾸 오해해서, 율법이 아닌 것이라는 말을,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지만, 로마서에서는 아니라 그랬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우리가 조건을 내놔야 되고 자격이 있어야 되고 무언가 합리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되는 것을 대표한다면, ‘믿음이란 그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 그래서 믿음은 율법과 행위와 반대편에 서서 믿음을 설명하는 다른 병행 단어는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나아가면 그것이 우리의 것으로서 어떻게 책임 있는 특권이 되는가도 알게 되겠지만, 로마서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느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입니다. 하느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오늘 본문 23-24절 다시 보면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으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 그러니까 강조는 전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에게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하느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그다음에부터 나옵니다. 믿음이 가능한 것은, 아니 믿음이라는 단어는, 예수로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예수는 이미 오셨다 이겁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태어나서 예수를 믿게 되어 믿음을 고백하고 결단하여 신자가 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면 그때 예수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는 2,000년 전에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신 분입니다. 이 시간상 역순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제가 있습니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뜻. 데카르트 철학의 제1명제. 그는 스콜라 철학에서 가르치는 진리에 의심을 품고, 참된 인식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 우선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회의론이 아닌 이와 같은 의심을 방법론적 회의라고 부른다. 이 경우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있는 '나', 이것을 의식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는 명석한 사실이라고 하고 그것을 진리 인식의 기초로 삼았다. 이 명제는 '따라서'(ergo)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추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사실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의식적 자아의 존재에 대한 직관을 표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은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근대적 개인의 자각이란 입장이라고 평가되어 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러나 '생각하는 나'를 유일한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오직 사고의 합리적인 연역에서만 진리를 찾는 것으로 되고, 여기에서 합리주의와 관념론이 나오게 된다. (철학사전, 2009) 철학으로 가려고 그러는 것 아닙니다. 생각해서 존재가 창조됐다는 뜻은 아니지요. 당연히 생각했더니 내가 생기더라 라고 얘기한 거 아니죠. 생각을 하는 거 보니까 내가 있더라. 입니다. 동일한 얘기를 구원에선 어떻게 얘기하냐 하면, 요한복음 9장에서, 실로암 사건, 내용이 기니까 제가 간략히 다루겠습니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고치십니다. 난리가 납니다. 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불치병을 고치는 것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언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보다 큰 메시아입니다. 그 예언자, 약속한 자입니다. 구원자입니다. 근데 구원자는 고사하고 예언자인 것도 부정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대적하는 이단이라고 당시 사회에서는 예수를 비난하는 중인데, 예수가 불치병을 고쳤답니다. 그러면 최소한 예언자는 돼야 됩니다. 그러면 그 예언자와 반대편에 서는 사람은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목격한 것입니다. 그 소경을 고친 사건을. 그러니 우길 수 있는 건 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정말 고쳤냐?" 그 다음에 하나는 "정말 소경이었냐?" 그래서 부모에게 찾아와 "정말 소경이었냐?" 그 부모가 말 잘못하면 큰일 나게 된 줄 깨닫고 직접 물어보지요. 이렇게 됐으니 본인에게 왔죠. "너 정말 예수가 내 눈을 떠서 보게 했느냐?" 이 사람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깨닫습니다. 이런 답을 냈습니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안 보이던 게 보여요." 구원에 관한 중요한 예입니다. 구원을 받으면요, 안 보이던 게 보입니다. 이게 막연할 수 있고 모호할 수 있습니다. 이거 하나는 분명합니다. 주일날 교회를 안 가면 불편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요구하는 건 어느 교회 어느 시대나 단 하나입니다. 빨리 끝내주세요. 그런데 또 오는 겁니다. 불편하다니까요. 영혼이 불편하다고요. 여기 와야 힘을 얻어요. 그래서 주무시죠. 절대 강론설교는 고함을 지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조용조용 이발을 하듯이, 안마를 하듯이, 때를 밀 듯이 해야 옳은 것입니다. 알아들었을까 이 유머를. 내가 봐서 생긴 게 아니라 있었는데 몰랐죠. 있었는데 몰랐다구요. 알게 되면 지가 만들었다 그래요. 그때 처음 생겼다 그러고요. 하느님이 왜 이런 순서를 만들었을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현실이고, 순서상 순리인데,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2천 년 전에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대요. 그래서 시대가 바뀌었대요. 이제는 새 시대다. 은혜의 시대다. 이렇게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데, 믿어야 내 것이 된다는 이차적인 문제라고 해요. 일단 믿고 나서도 보라고요. 그것은 그때 하시는 거예요. 이제 보니까. 그럼 왜 순서를, 오시고,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후에, 죄인으로 태어나요. 그리고 새삼스럽게 믿어서 알게 하는가? 그게 왜 과거로 돌아가는가? 로마서에서, 4장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 취소될 수 없게 하려고 그랬다. 결과부터 정해놓고, 너 태어나고, 너 믿어라. 선택해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게 먼저 일어났다고. 이게 뒤집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나중에 태어나지만 우리의 운명과 결과가 과거에 완료됐기 때문에 도망갈 데가 없다니까요. 이게 원래는 할렐루야! 아멘! 이렇게 가야 되는 겁니다. 근데 이제 이게 그 뇌에 과부하가 걸려가지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겁니다. 이게 성경이 얘기하는 복음입니다. 아브라함 얘기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됐다는 뜻은 아브라함이 믿음을 바쳐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 아닌 것이, 그의 이름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너는 만국의 아버지다. 그러고 자식을 안 줍니다. 결국 주시지만 그건 자기가 날 수 없었을 때 낳은 것입니다. 이건 ‘니가 만든 게 아니다’를 뭘로 확인했다고요? 이사악으로 확인했죠. ‘이사악 바쳐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만든 자식 아닙니다. 하느님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지가 자신이 얻은 결과를 만들어낼 조건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 이게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움으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이다. 예수가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에 본질이며 동일한 본질로 우리에게도 연속성을 가진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우리가 아직 죄인(罪人)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우리의 범죄(犯罪)함을 위하여 죽으시고, 징벌과 심판을 받아야 될 모든 인류를 쌓아 안고, 없애버리는 셈이죠. 그리스도의 죽음 아래 모든 인류가 함께 죽어 없어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새 인류가 등장하는 겁니다.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예수로부터. 근데 그 이후에 이 결과와 운명과 최종 승리를 여기다 못박아 놓고서, 우리에게 시작과 과정을 주십니다. 이건 우리는 모를 방법입니다. 대단한 역설(逆說)이죠. 어떻게 끝이 시작 전에 오느냐? 역설이죠. 마치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노인네가 나와서 과거를 회상하며... 이제 이렇게 화면이 바뀌어 그가 어려서부터 이렇게 지나간 얘기를 하는 것 같이, 우리의 운명을, 우리라는 존재와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결정하고 각각에게 자기의 삶을 허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상 우리는 뒤늦게 태어나고 우리가 늙고 하느님을 만나 배울 때까지의 인생을 자기의 선택과 여러 시험과 기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마는, 성경이 얘기하는 것은 결과를 예수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인류의 운명을 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감사한 일이라는 걸 하나도 모르는 얼굴로 듣고 있습니다. 창세기 28장에 가시죠. (창세28,10-15) 10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11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 간 뒤였다. 그는 그 곳에서 돌을 하나 주워 베게 삼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13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14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 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여기서 야곱은 아무 뭐가 없습니다. 대꾸도, 무슨 놀람도, 질문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이 야곱, 지난번 야곱을 예를 들 때 했던 거 같이 야곱이 자랑스럽지 않은 때, 기대하지 않은 때, 구하지 않은 때 등장을 하여 축복하는데 그 모든 이유는 뭐라고 그럽니까?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이겁니다. 그거를 역으로 갔다가 이해하면 아브라함도 그렇게 불렀다는 겁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떨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것하고 똑같이 아브라함에게 했고 그렇게 시작하신 것을 온 인류에게, 온 인류에게 허락하고 있습니다. 니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텐데, 니가 어디로 가든지 그걸 허락하니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예수 이후에 아브라함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했던 것처럼, 예수 안에서 그게 성취되어 오늘 우리의 현실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봅시다.
(로마5,1)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3,21-22)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신 하느님의 은총, 구원. 그 얘기가 이제 우리에게 현재입니다. 언제부터 현재였죠? 예수님 못 박히신 자리에서부터 현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믿어서 말고,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것 말고. 하느님 해서 시작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자.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 복입니다.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도자기를 깼습니다. 20억짜리라는 겁니다. 양쪽 아이 둘 다 도망갈 수 있는 만큼 가서, 어디 인적 없는 곳에서 떨고 있는 거죠. 어느 집에도 갈 수가 없는 거죠. 부모들이 찾고 있는 줄 모르죠. 한 이틀 밤 지나고 들어가면 좋습니다. 가서 맞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구나. 그래서 부모와 화해해야 됩니다. 맞을 거 맞고 받을 복 받아야 됩니다. 지금 그런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외면하고는 마음의 평화는 없습니다. 자꾸 도망을 가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 속에서 꼭 직면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현되는 인간이 뭐냐? 인생이 뭐냐? 라는 문제에서 세상이 주는 것은 답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모두 공감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것은, 자신이 멋있어지는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라고 나열되어 있는 성경의 약속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온유와 성실과 인내와 절제들은 그것 자체가 보배롭고 귀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을 값싸게 여기고 세상은 넘어뜨려서 이기고 빼앗아서 가지려고 하죠. 세상은 성공이라 그러고 그것이 인생이라 그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알게 되고, 그리고 고난을 받으면 더 알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면 결국은 이 문제에 갑니다.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슨 뜻이죠? 존재하는 것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무력하고 이렇게 기회가 없는데 존재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로마서 5장 3절,
(로마5,3-4)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를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의 운명, 우리의 승리, 우리의 완성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니 그 환란과 고난 속에서 이 운명을 가지고 사는 현실을 살아라. 2절이죠. (로마5,2)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멋진건요, 당구를 쳐보면 알아요. 질 줄을 몰라요. 지면 얼굴이 뻘개 갖고, 졌는데... 지면 이러는 거예요. “잘 치십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그러면 돼요. 우리가 왜 당구 하나를 지지 못하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니까, 승패 이외에 아무 가치도 발견할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다니죠. "건들지마. 같이 죽고 싶지 않으면 건들지 마." 뱀 대가리가 돼버린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우리 스스로가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하느님 왜 이렇게 살게 하셨어요?" 그거요. 조금 전에 얘기한 거 같이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오니, 이것이 속한 성경의 답이 있죠. 고린도후서 4장 5절입니다.
(2코린4,5-10) 5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6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9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10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결정된 운명을, 승리를, 영광을,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펼치라고 합니다. 그것은 책임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고 우리의 영광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 길을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은 취소될 수 없는 역사적 과거입니다. 우리가 언제 믿고 언제 알게 되느냐는 것이 각각 다를지라도 결국 우리가 예수를 믿고 확인하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놓아두지 않았다를 확인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하느님이 우리가 믿을지 안 믿을지 볼라고 태어나게 했다구요? 아 그러면 안돼요. 하느님을 얕보시는 거예요. 우리가 믿으면 끝날, 믿으면 그것이 다인 걸 하려면 이렇게 끌 필요가 없죠. 하느님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와 어떤 충만을 구체화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광을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성경에서 하느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냥 멋있게 사십시오. 사람이 멋있는 건 어려울 때 드러난다니까. 성경이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대라고. 세상은 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만 할 수 있는 겁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대응하고 힘으로 힘을 대응하면 누군가가 죽어야 일이 마무리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신을 믿으라고 하더냐?" 이런 표현이 우리 그리스도교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신(神)은 전지전능해서 날 편하게 해줘야죠. 내가 하고 싶은 걸 줘야죠.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창조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이 시간 속에도 나타나서 시간이 역순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까요. 우리의 후회, 우리의 실패는 영원히 씻을 수 없고 만회할 수 없는 과거지만 그것이 무얼 만드는가는 다른 문제라니까요. ‘모든 훌륭한 사람은 재수생이다’. 그런 말 들어보셨어요? 지금 막 만들었으니까 처음일 거예요. 삼수생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죠. 안 갔으면 감히 세상이 감당 못하지요. 그 열등감과 그 절망과 후회와 고뇌가 그 속에서 무얼 만들었겠습니까? 얼마나 깊은 걸 만들었겠습니까? 편안하고 생각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생각을 하는 것은 자랑의 문제가 아니라, 외적 성과가 아니고 인격과 성품으로 드러나며 그것이 인격과 성품으로 가지고 있다면, 도전하는 구체적 현실 위협 앞에서 답을 해야 됩니다. 해결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 풍상을 겪고 자리를 지켜야지요. 외면당하고 억울할 수 있으며, 그 일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어떤 그늘을 주고 어떤 보호를 주는 하느님의 손길로 서 있을 수 있는 자, 그것이 실력이죠. 가져서 만들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그걸 이루시며 그렇게 일하신답니다. 필리피서 2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한 기록은 매우 놀랍습니다. 이 놀라움을 잊지 마십시오. (필리2,5-11)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하느님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의 자리까지 찾아 들어오시는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부정하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에게 항복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일을 이미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보고, '이제는' 인 것입니다.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현실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져야 되고, 언제나 무흠해야 되고 하는 싸움 아닙니다. 도덕성에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 어떤 관계,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약속했고 이루었고 붙들어 지금 함께 하고 있느냐에 관한 일들입니다. “아주 어렵거든 예수를 생각하라” 라는 말은 예수님이 그걸 참은 걸 생각하라가 아닙니다. “그것이 영광으로 가는 길이었단다. 영광은 고난 속에서 빛이 난단다. 그것 없이 빛이 날 수는 없단다. 어떻게 할래?” 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 우리는 지금의 우리 지위와 환경이 불만이세요? 예수님은 자동차도 없었는데, 보험도 안 들고. 다시 한번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현실적, 운명적, 승리와 영광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진지하게 인생을 살고 그 속에서 멋진 승리를 확인하세요.
기도합시다. 하느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어 그 약속하신 일을 이루고 있는지 우리는 고백하여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헤매고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이 이미 주신 승리, 주신 행복, 영광, 자랑, 명예, 믿음으로 붙들어 안아 우리의 생애 속에 펼치는, 누리는, 자랑하는 복된 인생인 것 알게 하여 주소서. 감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