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마르코 1, 21 - 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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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01-09 | 조회수221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1, 22. 27) 우리는 현재 탈권위脫權威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주 듣는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는 말은 권위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직책에 합당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과거 세속적인 권위는 나이, 직위와 직책 등에서 자동적으로 부여되지만, 영성적 권위는 존재와 삶에서부터 파생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권위exousia는 외부에서 부여되는 권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부터 나오는 권위이며 힘입니다. 기성세대라고 불리는 우리는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지도자들에게 오래도록 시달려 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기성세대의 의식 저 밑바닥엔 권력과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려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게 참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예전엔 흔히 權(=힘)을 가진 사람들은 권을 행사하는 권한으로 생각하기에, 망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못처럼 보인다, 라는 말처럼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렇게 인간적으로 성숙하거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여러 권력자는 자신을 병들게 하고 불행에 빠졌으며, 그로 인한 피해는 당연히 약자들인 국민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원화된 세상과 탈권위 시대에서는, 정치 분야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도덕성’이 가장 중요한 지도자의 요건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신문사의 여론 조사에서 21세기 지도자의 제1 덕목이 도덕성 24.6%’ 그리고 제2의 덕목이 미래에 대한 비전 20.4% 그리고 국정운영 능력 19.5% 등으로 조사되었다고 할 만큼, 도덕성은 우리가 우리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워합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1,21~22)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말투나 외모는 영락없는 시골 사람의 모습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당대의 율법 학자들과 다른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음을 느끼고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아, 이게 뭐지!’ 무엇이 예수님의 단순한 가르침에 당대의 다른 지도자들과 다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였을까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서 느껴지는 권위는 하느님의 힘, 곧 성령 충만에 따른 活力이었으며, 이는 다른 권위자와 전혀 근본과 본질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지도자들의 권위는 아래(=땅)에서 왔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위(=하늘)에서 주어졌기에 권위 곧 힘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표현에서 드러난 것은 말하는 사람 스스로가 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그 말을 살고 있으며 깨달은 것이기에 듣는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쉽게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파생된 메시지의 단순명료함으로 말미암아 군중들은 예수님 말씀의 진정성과 진솔성을 느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예수님의 권위는 한 마디로 言行一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로서 말씀하신 분이라기보다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증거하신 분이셨기에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껏 백성들은 자기 지도자들의 듣기 좋은 말과 허울 좋은 가르침을 듣고 살았지만, 그들은 말만 앞세우면서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았음을 마태오 23장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통렬하게 비난하셨던 까닭입니다. 과거의 권위는 나이, 직책, 배움, 경험,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자동적으로 주어졌지만, 현재의 권위는 그 직책을 맡고 있는 그 사람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 곧 그 사람의 언행일치된 삶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해 준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책만 있지 권위는 없고 그 권위에 대한 반감과 그 권위에 저항합니다. 권력자 삶의 실천이 없는 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으며, 말만 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권위를 느끼지 못하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권위의 상실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2010년부터 현재까지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변화의 힘이었고 담론이었던 것입니다. 몸으로 가르치니 따르고, 말로만 가르치니 반항한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바로 높은 사람 곧 권위자가 먼저 허리를 굽혀 몸으로 가르치는 겸손과 스스로가 자신이 말한 바를 삶을 통해서 살려고 할 때 우러나온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권위자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실제로 당신의 言行을 통해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악마마저도 예수님의 이런 권위를 인정합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악마마저도 하느님의 사람임을 인정하고,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1,24)하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기에 거룩함은 하느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권위는 인간적인 겸손만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권위임을 더러운 악령의 입을 통하여 알려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1,25)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1,27)하고 반응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표현한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저마다 원칙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 불행해지고 인간다운 삶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길이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는 방법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살아야 그 길과 그 원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야 할 바를 충실히 살 때만이 ‘더러운 영’의 억압과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과 구원을 체험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악령의 추방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권위를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그 소문이 곧바로 온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의 고백과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이 새로운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야 합니다. 경험적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내외적으로 온전한 순명이 가능하지만, 권위가 없는 사람 앞에서는 단지 외적으로 순명이 있을 뿐 내면에서는 존경을,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1테2,13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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