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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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1-17 | 조회수459 | 추천수6 | 반대(0) |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런 심성을 ‘시기’라고 말합니다. 시어머니가 맏며느리를 예뻐했는데 둘째 며느리가 들어오자 둘째 며느리를 더 예뻐할 때 시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맏며느리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질투’라고 말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비슷한 면이 있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시기와 질투를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시기는 갖지 못한 사람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고 질투는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에 대한 명언들이 있습니다. “시기는 증오보다 더욱 비타협적이다. 시기심은 살아 있는 자에게서 자라다 죽을 때 멈춘다. 우리들의 불행을 마음속 깊이 애통해 주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지만, 우리들의 성공을 마음속 깊이 시기하는 사람은 몇 천 명이나 있다. 녹이 쇠를 좀먹듯이, 질투는 그것에 사로잡힌 영혼을 병들게 한다. 인간에게 보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악의와 증오,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는 열망이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 질투는 휴일이 없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아담이 ‘교만’함으로 하느님을 거스른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카인이 ‘시기와 질투’로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범한 최초의 죄입니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는 공동체를 갈라놓고, 분열시키는 힘이 강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다윗이 이민족의 침입을 잘 막았는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의 친구이자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은 아버지에게 다윗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울은 아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의 시기와 질투는 사울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본당을 옮겨 다녔는데 한 번도 강남으로 간적이 없었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모두 강북에 있습니다. 처음으로 본당 신부가 되어서 간곳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성성당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은 대부분 강남과 강북을 오가면서 사제생활을 했는데 저는 강남스타일이 아닌 것처럼 강북에만 있었습니다. 강남에서는 지내지 못했지만 미국 뉴욕에서 5년째 지내고 있으니 저는 뉴욕스타일이 맞나 봅니다. 시기와 질투보다 약한 것이 ‘부러움’인데 그 정도는 하느님께서도 애교로 봐 주실 것 같습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원망은 오해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큰 갈증이 생깁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과 표징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 계명의 그물로 예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 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기와 질투, 명예와 권력, 자존심과 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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