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34)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 (로마12,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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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23 | 조회수15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1. 23. (화요일) 로마서34)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 (로마12,1-5)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3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4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5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은 ‘그러므로’로 시작했습니다. 그 앞에 있는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을 전제로 해서, 그 결론에 이른 셈이지요. 하느님의 구원과 성실하심과 능력과 의지를 보았으니 그 허락된 구원을 구체적으로 살라. 너희 몸을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삶으로 드리는 제사로 살아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은 분별이 됐죠. 예수 믿고 사는 인생이 하느님 없이 사는 인생과 어떻게 다른지를. 다만 도덕적이거나 기능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요, 정체성과 명예를 가지고 확인하곤 해라. 너 떠밀려서 살듯이, 억지로 책임 때문에 하는 게 아닌, 영광인 줄 알아라. 그게 2절이라면 오늘 3절은 그렇게 사는 우리의 실제적인 인생이 많은 제한 속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듯이, ‘여러분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라.’ 오늘의 중요한 본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조금 더 강조하고 나서야 이 3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한다. 라는 것은 이미 허락된 자비, 허락된 구원을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가면 이 문제에 대한 그림 같은 역사적 증언이 있습니다. (출애19,1-6) 1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이 그 곳 산 앞에 진을 친 다음 3 모세는 하느님 계신 곳으로 올라 갔다. 야훼께서 산에서 그를 부르셨다. '너는 야곱 일족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 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5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6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 줄 말이다.' 구원은 이루어진 겁니다. 구원받아 여기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구원을 받았는지 보았으니 너희는 내 백성이 되어라. 그 영광을 누려라. 나를 순종하고 내 약속을 지켜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소유, 직역하면 내 보물이 되리라. 이루어진 구원을, 허락된 은혜를 보존하기 위해서, 죄 갚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이루신 구원의 영광을 누리는, 세상은 알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못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예전엔 할 수 없었던 영광을 사는 것입니다. 책임이나 의무나 명분이나 이런 더 값없는 것으로 이 영광을 가리지 마십시오.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위로하고 유익이 되고 격려가 되는 걸 해야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런 구원과 허락된 새로운 인생, 새 생명 혹은 성경에서 표현하는 새 사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 하느님의 창조의 진정한 영광을 예수로 인하여 비로소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을 값싸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굉장한,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인가는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너무나 깊고 크게, 놀랍게 증언된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거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군지 묻고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약속하셨습니다. 천국 열쇠를 맡겼죠. 우리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우리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이 영광된 일은 그러나 예수가 죽어서 이루실 거라고 합니다. 거기에 다 녹아났죠. 베드로가 ‘그리지 마소서’ 했다가 꾸중을 듣고,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다시 듣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여기가 우리에게는 책임이라고 자꾸 이해되고 있습니다. 여기는 책임이 아니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준 구원과 새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확인시키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피를 흘려, 그걸 감정적인 것으로 동기를 삼으려고 하지 말고, 값비싼 대가를 정말 치루시고 준 기회요, 인생이라고 그리고 존재라고 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모든 능력과 열심이 들어 있는 거라고 이해를 하라는 것이죠. 필리피서 2장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필리2,12) 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는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에게 준 구원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얼마나 영광된 것인지 알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네요. 앞에 뭐가 있죠? 이 논리적 결론 앞에, 그 결론을 성립시키는 전제가 있죠. 뭐예요? (필리2,5-8)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것들을 이렇게 추상적인 단어로 메꾸지 말라는 거죠. 눈물, 감동, 각오, 헌신, 희생, 이렇게 묶지 말고 그 단어들이 실체가 되어 그 인생에 구체적으로 시행됐다는 것을 기억하려는 겁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분인데, 그분의 ‘태양은 내일 또 다시 떠오른다’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읽어보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나도 모를 그런 내용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군 몇 명이 이제 제대해서 그 동안 밀려 있던 봉급, 그러니까 목돈을 가지고 집에 가봤자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젊고 시간이 있고 돈이 있어서 스페인으로 놀러가서, 거기 놀러 온 다른 미국인 관광객들과 어울려 그냥 흐지부지 놀고 싸우고 그러고 끝나는 소설입니다.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소설 이었습니다. 이런 얘기죠. 이순신은 죽었어. 그게 역사입니다. 이순신은 나라를 구했어. 이게 역사입니다. 근데 우리는 이 말에 너무 많은 장식을 붙여서 그 장식 때문에 본문이 안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린 얘기를 하면 확 미친놈 같지요. 그게, 이런 말들이 난무를 해서 원래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을 살아내시오. 떠들지 말고 변명하고 설명하고 극화시키다가 실제로 산 건 없고. 각각 80년 전후로 사는 인생이 자기가 살아가는, 예수께서 그렇게 죽어나간 인생을 산, 그 길을 쫓는 그 제한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예수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했답니다. 그게 제한입니다. 각자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말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우리 인생 속에서 직면하는 현실적 조건입니다. 나는 납니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나는 당연히 그들이 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많은 제한된 조건 속에 묶여 있습니다. 가장 크게 시간과 장소,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죠. 우린 무소부재(無所不在)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두 군데 있을 수 없지요. 그리고 각각의 조건은 다릅니다. 남녀의 조건이 다르고 김씨, 이씨, 박씨의 조건이 다르고 문중이 다르고 속한 사회와 유산이 다릅니다. 좋고 나쁘고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예수는 그 시대에 메시아로 와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가장 처참한 죽임을 당하지요. 거기서 하느님이 부활과 구원과 회복과 영광을 만들어내시죠. 그 제한을 사는 것을 성경은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는 제한을 벗어나서 쓸모 있어야 되고 공적인 권력을 갖고 싶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하느님의 선민(選民)이라는 특별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잘못하면 잘못한대로 벌을 받습니다. 그들은 결국 망해서 바벨론 포로가 되어 돌아왔으나 결국 로마에 다시 지배를 받고 예수가 오셨으나 거부하여 나라 잃고 2,000년을 헤맨 족속이 됩니다. 하나도 봐주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 있었던 이야기 속에 나오듯이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 ‘너희 이방이 조건 없이 구원받은 것을 보면 당연한 운명일 것 아니냐?’ 이게 로마서 얘기였죠.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이라도 어떤, 말하자면 편애, 특혜를 입지 않았던 것 같이,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이 누구며 인간이 무엇이며 역사가 무엇인가를 다만 설명을 하거나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을 결국 이루셨듯이..... 구약이 신약을 낳았을까요? 그렇진 않죠. 구약은 실패한 이야기니까.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선민이. 그러나 신약은 구약을 무효화하나요? 잇고 있죠. 신약은 구약을 잇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이라는 그 머릿말이 혹은 그 앞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갈 수 없는 자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하느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이십니다. 하느님의 의지와 은혜의 무한함과 능력을 보이시죠. 이스라엘의 실패를 가지고 일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은, 하느님이신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당할 수 없는 억울함을 당하게 하시고, 죽음을 당하게 하심으로 또 그의 일을 이루십니다. 이게 무슨 빠져나갈 자리가 있겠습니까? 도망갈 자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과 영역과 경우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 끌어 안는 거죠. 성경의 놀라움이죠. 예수, 전지전능하셔야 마땅한, 하느님과 동등한, 본체이시나 영광을 버리고 순종하는 자리에 옵니다. 순종하는 자리란 제한의 자리에 오는 것이죠. 모든 신자들의 병, 제한이 방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우리가 가지는 모든 조건들, 소원만큼의 능력과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성경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볼 때 제한이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것은 제한이 아니라 구체적인 거다”라고 말씀하세요. ‘나 아무개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막연하지 않습니다. 진심, 행동, 감독, 이런 말이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그것이 내용을 잡고 있어야죠. 헤밍웨이가 와서 째려볼 겁니다. 본문이 있어야죠. 장식을 할 주체가 있어야지요. 자기와 자기 인생, 자기와 자기 정치, 이것이 없이 그것은 살아내지 않고 장식만 소원하는 바람에 배추는 없고 양념만 있게 됐습니다. 그래도 그건 먹을만 할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기에서 매우 조심해야 돼요. 시편 90편에 가면 모세가 유일한 고백을 하나 남겨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입니다. (시편90,1-12) 1 주여, 당신은 대대손손 우리의 피난처, 2 산들이 생기기 전, 땅과 세상이 태어나기 전, 한 옛날부터 영원히 당신은 하느님, 3 사람을 먼지로 돌아 가게 하시며 '사람아, 돌아 가라' 하시오니 4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5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 6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이옵니다. 7 홧김을 한번 뿜으시면 우리는 없어져 버리고 노기를 한번 띠시면 우리는 소스라칩니다. 8 우리의 잘못을 당신 앞에 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 당신 앞에 낱낱이 드러납니다. 9 당신 진노의 열기에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세월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10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 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11 누가 당신 분노의 힘을 알 수 있으며, 당신 노기의 그 두려움을 알겠습니까? 12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 그냥 읽으면 탄식 같습니다. 이런 탄식이죠. 모세는 120까지 살았습니다. 80에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서 구국의 영웅이고, 그리고 40년, 그저 죽기 위해서 방랑생활을 했던 40년을 그의 백성들과 함께 삽니다. 애굽에서 그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모세를 통하여 하신 10가지 재앙을 두 눈으로 본 사람이요, 홍해를 가른 사람이요, 구름기둥 불기둥에 인도함을 같이 누린 사람이요,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 사람, 그리고 그 40년 방랑 생활에서 여기 탄식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못난 것을 실컷 봤지요. 탄식을 합니다. 인생들은 다 헛되게 삽니다. 이렇게 못 났을 수가 없습니다. 바보 같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느님, 여기서 다 죽어버리고 말, 아무것도 아닌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그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구름 기둥을 보내셨습니까?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까? 그 40년을 만나를 주셨습니까? 하느님, 이들이 그토록 귀합니까? 이 바보들이, 이 못난 것들이 그렇게 하느님께 소중하십니까? 그 말을 하고 있지요. 우린 우리가 수(數)에는 들어도, 개인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오천만에 들어있겠지만 누가 나를 알겠습니까? 여기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죠. 그 40년 동안 죽어 나간 사람들을 우리들이 누가 알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은 열 가지 재앙을, 홍해를 가르고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내신 하느님입니다. 크게 도매금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가 아니라 각각의 인생을 그리하신 하느님이신 것, 그러니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익명으로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지위로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참으로 억울하고 연약하고 무능한 자로 사는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이 답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른다면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말을 아직도 모르는 것입니다. 확인이 돼야 되고, 능력이 있어야 되고, 유용해야 되는, 기능적 차원에서 우리를 확인하려고 하면 하느님은 그 확인은 절대 안 해주십니다. 이게 오늘 얘기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말라.” 만만치 않은 얘깁니다. 우리의 조건을 갖추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널리 펼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우리들이 모여 앉았을 때 무슨 명절이나 무슨 일로 가족이 다 모여 앉으면 누가 복입니까? 이제 나이 들어보니까 웃는 사람이 복입니다. 누가 웃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한 사람이죠. 그걸 세상은 못합니다. 세상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밖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다른 방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겨서 뭘 얻어갈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서로 비난하고 죽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정확히 그 반대죠, 우리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보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현이 됩니다. 우리의 고난, 우리의 실패, 무능까지도..... 당시 제자들이 다 도망간 이유가 뭐였죠? 죽는 데는 또 기다릴 게 없다. 예수께서 죽으시겠다는 데는 뭘 기다리 겠어요? 다 도망가 버렸지요. 우린 우리의 죽음을 예수 안에서 잘 해석해야 되는 것이죠. 죽음이 끝이라고 말하는 건 세상이고 죽음이 부활로 가는 길이라고 아는 것이 신앙인들이 사는 현실적인 이해입니다. 겁날 것이요, 갈라디아서 6장에 가면 바로 이 문제를 성경은 이미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라6,1-5)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2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십시오. 3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4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해 봅시다.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이지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못됩니다. 5 각 사람은 자기 짐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말이 나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짐을 나누어 져야 된다. 그러나 다시 뒤에 와서는 자기 일을 살펴 자부심을 가져라. 그리고 자기 짐을 져라. 그렇게 됩니다. 앞에는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것, 뒤에는 자기 일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둘이 모순되어 보이고, 짐을 나누어지라는 권면 뒤에 각각 자기 짐을 지라는 또 모순이 등장합니다. 이런 얘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한 사람의 정체성은 이웃과의 관계, 이웃과의 조화 속에 있습니다. 율법의 요약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인 것처럼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은 그 이웃에게 있어서 중요한 존재여야 합니다. 관계성 속에 있습니다. 관계성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확인할 때는 그것이 무인격적인 것에 매일 때입니다. 사랑, 정의, 평화, 감동, 행복, 이런 거랑 묶이면 옆 사람과 상관없이 독립적 가치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런 단어들이 잘못이 아니라, 관계성을 벗어나, 다만 명분이 될 때, 다만 가치에 불과할 때, 그렇게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랍니다. 짐을 나누어 져야 됩니다. 짐을 나누어진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제가 연상했던 그림은 그물이었습니다. 그물코는 독립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물코 하나만 있는 걸 그물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물이면 최소한 1미터는 돼야 됩니다. 그렇죠? 그물의 특징은 모두가 힘을 나누는 것이죠. 누구에게 옆에 붙들려 있는 것인지, 옆을 잡고 있는 것인지 모르게, 묶여있는 게 그물입니다. 축구 골대 뒤에 골망이 있죠. 영어로 정확히 골 네트입니다. 골망이죠. 그렇게 슛을 해서 공이 들어가면 '골망을 흔들었다.' 그렇게 하지요. 축구공이 들어간 자리만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게 전부에게 힘이 나누어져 출렁출렁 춤을 추지요. 하느님이 우리라는 인간을 만드시는, 존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그런 관계를 위한 독립된 인격으로 구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모양대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짓자.” 이렇게 복수로 등장합니다. 굉장히 신비롭고 나중에 천국 가야만 알아볼 그런,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좋은 예를 들자면 합창 같습니다. 합창은 제창과 다르죠. 같은 음을,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다른 음정을 내서 화음을 만드는, 솔로를 잘하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이중창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화음이 있으니까요. “혼자 자기 거 다 했으면 다다.”라고 생각하는 건 아직 모르는 거다. 그거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개념, 어느 어느 비인격적인 데 묶여서 자신을 확인하고 있어서 아직 멀었다. 이겁니다. 둘이 갈 수 있느냐? 너네 같이 갈 수 있느냐? 이렇게 묻는거죠. 합창을 하면 제일 중요한 파트가 베이스입니다. 베이스가 없으면 합창이 근거를 잃습니다. 베이스 위에 소프라노든 엘토든 테너든 춤을 추는 겁니다. 그 춤을 추게 하기 위해서 베이스는 춤을 추면 안 됩니다. 그래서 베이스는 멜로디가 없습니다. 베이스가 제일 어렵기 때문에 아무나 갖다 넣습니다. 그쵸? 멜로디가 아니니까. 들어와서 신통치 않으면 다 베이스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산다는 걸 아시나요? 하느님이 우리를 베이스로 놓고 있다는 걸 아시나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멜로디가 없는 그 맛없는 맛을 아시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대함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뭐라 그랬다구요?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않는 것은 뭘까요? 내가 유일해져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내 몫을 하는 거죠. 내 자리는 누가 대신할 수 없어요. 우리는 2인분을 할 수 없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에 귀중함을 압니다. 자기 짐을 집니다. 이해하셨나요? 모르면 희망을 늘 불안해하고 의심할 수 밖에 없어요. 억울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든 것과 억울한 건 다릅니다. 합창을 하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명예로운 것입니다. 성가대에 까운 입고 앉아있는 게 얼마나 큰 건지 아십니까? 지휘자에게 추천서를 써줘도 지휘자가 선택하면 주임사제 추천이라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뭘 볼까요? 음악만 보지 않을걸요. 표정을 많이 봅니다. 그죠? ‘저거 내가 아는 곡인데 조금 다르다. 표정을 보니까 편곡을 다르게 했나 보다.’ 사실은 틀린 거죠. 그렇게 세상 속을 살아 가야 됩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복 주신 것 같이 "너는 복이 될지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걸 갖고 사는 겁니다. 그럼 우리의 그 한계, 그리고 그 한계를 다른 말로 해서 구체성을 감수하십시오. 소극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것 기억하시오. 자기 자리를 지키시고 웃으시오. 하느님이 그 다음은 다 하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불평과 불안을 주 예수 안에서 해결해야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 길을 걸어야 맞습니다. 그 걸어낼 믿음과 은혜와 그리고 이웃과 함께 가는 넉넉한 복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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