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겸손 된 순명만이 참 권위를 /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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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1-28 | 조회수21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겸손 된 순명만이 참 권위를 /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나해(마르 1,21ㄴ-28) 평생 살면서 좋은 인연 맺을 수 있음은 커다란 축복중의 축복이다. 우리 시대에 김수환 추기경님을 뵐 수 있었던 것도 그 한 예리라. 가까이 뵌 분의 추억담이다. 추기경님은 경당에서 늘 밤늦게까지 기도하시었다. 저도 가끔 경당에 올라갔다. 그때마다 무심코 신발을 벗고 들어갔는데, 나올 때면 언제나 신발이 가지런히 있었다. 추기경님이 나가시면서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두신 것이다. 젊은 후배에게 말없는 가르침이었다. 이는 몸에 겸손이 배어 있지 않으면 힘든 일일게다. 진정한 권위는 바로 허리 굽혀 몸으로 가르치는 겸손에서 우러나온다고 본다. ‘어느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이가, 소리를 지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는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그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에게 큰 소리 지르면서 나갔다. 그러자 모두가 놀라,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서 나갔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분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나. 그분께서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에. 예수님 말씀도 쾌나 권위가 있었던 것 같다. 대개 권위라는 말은 부정적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대부분 좋은 의미다. 그러기에 ‘그분께는 권위가 있었다.’라고 곧잘 언급이 된다나. 그만큼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그것은 권위는 좋으나, 다만 ‘권위적인 것’은 좋지 않다는 거다. 예수님에게는 권위는 가지고 계셨지만, 결코 권위적이지는 않으셨다. 누가 뭐래도 오히려 겸손하셨다. 또한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다. 제자들을 훈계하시되 그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라 하지는 않으셨다. 오늘날 너무 권위적인 이가 많아 자주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주어진 권위마저 실추되어 지저분한 추태 끝에 꼴사납게 낭패를 보는 사례도 더러는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권위를 유지할까? 권위를 가지려면, 먼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면을 받들어, 이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적에 많은 이가 권위를 느꼈던 것은, 그분 말씀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지혜의 가르침이었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을 느끼시고는,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거기에서 벗어나라 가르치셨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새롭게 창조하기를 바라신다. 이렇게 다가올 미래는 설렘과 기다림으로 다가온다. 이는 순명의 겸손만이 가능하게 할 게다. 나아가서 남을 향한 배려가 몸에 배이지 않으면 힘들게다. 이런 삶에서 진정한 권위가 생겨난다. 이게 바로 김수환 추기경님이 보여주신, 허리 굽혀 몸으로 가르치는 겸손에서 묻어나온 게 아닐까! 세상이 속되고 속물로 가득 차도 하느님의 거룩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존경하는 성인들의 삶에서 드러난다. 주변에 거룩한 순명의 삶을 사는 성인들의 겸손과 사랑이 있는 한, 세상의 권력과 권위가 하느님 영의 권위를 이길 수가 없음을 새기자. 성모님께서도 언제나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낮추시어 곰곰이 새기셨다. 그 비천함을 주님께서 굽어보시고 자비를 베푸셨다고 믿으셨기에, 은총을 가득히 받은 여인으로 여태껏 만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거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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