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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성 요한 보스코 기념(연중 제4주간 수요일): 마르코 6, 1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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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30 조회수270 추천수2 반대(0) 신고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6,2-3)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히고 난 뒤부터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1,14)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지역은 갈릴래아 주변 지방들이었고, 활동기간은 약 3년으로 추정되며, 선교 효과는 복음의 수용과 믿음보다 불신과 거부가 더 많았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신 일이 빌미가 되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를 죽일 모의를 하였고(3,6),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였으며(3,21.31), 군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고(4,12), 그분을 배척하였으며(5,17), 선발된 12제자(3,13-19)들까지도 스승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고(4,40),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4,41)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받지 못했으며 그분의 행적은 철저하게 거부되거나 배척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을 방문하셨는데 심지어 고향 사람들에게도 무시당하고 푸대접받으신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밤과 낮을 가르지 않으시고 가르치고 기적을 일으키시며 열심히 살았는데 왜 예수님의 열정적인 노력과 진심이 모두 외면당하고 거부와 배척당하고 말았을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 쉽게 눈높이를 맞춰가면서 가르치시고, 그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치유해 주시고 심지어 먹여 주시기까지 하였는데도 이 모든 일이 공염불이 되고 말았을까? 주님의 가르치는 스킬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스킨십이 잘못되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드러난 문제의 본질 내지 핵심은 주님보다는 주님의 언행을 보고 듣는 인간의 문제인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다른 종교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인간 공통의 문제인가 봅니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는 한 문장으로 결론지으셨는데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라고 요약하셨습니다. 불교 선종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마조 선사라고 합니다. 오래도록 도를 닦던 그가, 득도하고 난 뒤 잠시 고향에 들른 일이 있었는데 이웃에 살던 한 노파가 그를 보고, “나는 무슨 대단한 양반이라도 와서 이렇게 소동이 났나 했더니 바로 쓰레기 청소부 마 씨의 아들 녀석이 왔구먼!” 하더라는 것입니다. 고향의 할머니는 세월이 변하고 사람이 달라졌는데도 어린 시절의 꼬마로만 여긴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조는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지었답니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선의 황금시대에서) 이것이 인간의 깊은 죄의 습성이며 악한 마음입니다. 단지 예수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렇게 가장 자신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낡은 기준이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면서 분명 놀랍게 변화된 모습과 지혜와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평가 절하 곧 우리와 똑같잖은데 뭘 하고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은 자신들의 속셈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지만, 내적 열등감을 감춘 채 남의 잘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어둠이, 상처가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심연, 마음에는 무엇이 있기에 자유롭지 못한가? 자기 내면을 직시하지 못했기에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6.3) 는 표현은 이를 극명하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진리와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같다고 여겼던 그분의 존재 자체, 자신들과 그분의 함께 여기 있음 자체가 자신들의 내면에 내재된 열등감을 뒤흔들었기 때문인데도 그런 내적 움직임을 바라보기보다는 거부했던 것입니다. 흔히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잖아요. 예수님의 존재가 그들의 가장 깊은 내면의 열등감을 자극했고, 상대적으로 너무 크신 그분 앞에 자신들의 존재가 불편해지면서 그 탓을 주님께 돌리면서 뒤틀린 자신들의 심사를 한 마디로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 너 잘 잘났다 정말!

예수님의 본심은 당신 고향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그들이 세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셨고 그 모든 것을 위해 기적도 일으킬 수 있었는데, 고향 사람들에게서 다가오는 차가운 반응과 매몰찬 거부를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면서 그곳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듣는 것을 통해서 들을 수 없는 것,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길 바라셨던 예수님의 간절한 원의는 무참하게 깨졌고,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겉모습만을 보고 평가하고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사실 돈, 권력, 명예, 학식, 출신 가문과 성분, 학벌 따위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입니다. 「종교박람회」라는 ‘드 멜로’의 책에서도 표현되었듯이 그것들은 참나 眞我가 아니라 거짓된 나 妄我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늘 상 다른 사람의 속 모습보다는 겉모습이나 껍데기만을 보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다 하느님 앞에 가면 다 거짓이고 헛된 것입니다. 그런 고향 사람들을 꿰뚫어 보셨기에 예수께서는 애당초에 크고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믿음이 없어도 너무 없는 그들을 보고 놀라셨던 모양입니다. (6,6참조)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믿음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기적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도 기적도 오직 그것을 간절히 찾고 구하고 두드릴 때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17, 6)라고, 이미 주님께서 믿음의 중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가 바로 어제 복음에서, 회당장의 딸의 치유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것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고 용서와 구원이 베풀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활동 곧 자비와 사랑의 행적이며 믿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영성체송)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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