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마음의 문 활짝 열어야만 / 사순 제4주간 수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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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3-13 | 조회수10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마음의 문 활짝 열어야만 / 사순 제4주간 수요일(요한 5,17-30) 살면서 가끔 폭풍에 휩쓸리거나 바람에 날려 가진 것 다 잃기도. 대자연의 진짜 바람도 있지만, 사람이 만든 욕심 참 세다. 큰 나무는 폭풍에 가지가 찢기고 뿌리도 뽑히지만, 풀들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나 생명력은 그래도 간직한다. 세상에는 욕심의 폭풍에 빠져 우울증 걸린 이도 쾌나 있다나. 탐욕 앞에서는 낮추자. 그게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참 모습이리라.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이,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 뜻이 아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에. 예수님과 아버지의 일치는 순명을 근거로 하고, 이는 또한 자신을 온전히 비울 때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목표를 내려놓고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스도교의 비움과 다른 종교의 비움은 나름 차이가 있으리라. 그 비움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것을 나타낼 게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당신 뜻은 ‘아무것도’ 없단다. 당신 능력까지도 그분께서 주셨다나. 그러기에 당신을 따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라나. 이렇듯 그분의 ‘모든 것’은 순명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평소의 노력과 훈련이 없으면 어렵다. 가장 큰 순명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일 게다. TV에 나온 어떤 이가 자신의 별명격인 아이디(ID)는 ‘나무’라고 했다. 식물을 나타내는 ‘나무’가 아니라 ‘나 무(無)’라는 것이다. ‘나는 없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나. 자신의 존재를 비우고 무화(無化)하는 것은 무아(無我)의 경지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무아를, 예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비워 거룩한 성체가 되셨단다. 우리도 비우고 온전히 그분과 하나 된 믿는 자 되자. 그렇지만 비움은 단순히 집착과 탐욕을 끊는 것만은 아닐 수도. 또 세상 것 무의미한 것만으로 보는 것도 아닐 게다. 진정한 비움의 의미는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우리가 그냥 비운다고 비워지는 게 아닌, 사랑함으로써 내 것이 비워지는 것이다. 누구를 사랑하고 생명주려 할 때에, 비로소 비움이 시작될 게다. 19세기 영국의 화가 윌리암 홀먼 헌트가 그린 ‘등불을 든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한밤중 정원에서 예수님께서 한 손에 등불을, 다른 손으로는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그림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어떤 이는 그게 그 그림에서 잘못된 것이라지만, 사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은 거란다. 그 문은 사람들 마음에 이르는 문이기에. 주님께서 우리네 마음에 들어오고자 하시지만, 우리 마음의 문은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문을 열고 당신을 맞아들여 함께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려, 오시는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그렇다. 아버지의 것은 아들의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일이나 자신이 하는 일이나 같은 거라고 여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기꺼이 함께하셨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하느님과 일치하셨고, 하느님 일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단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신의 일을 하느님 일로 여길까? 그분께서 그토록 들어오고 싶어 하시지만, 우리 마음은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간의 것들 죄다 버리고 그분 사랑 받아들이자. 주님은 우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당신을 맞아들여,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아 찾아오시는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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