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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닮의 여정”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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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13 조회수183 추천수5 반대(0) 신고

 

-하느님 중심의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하루하루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참 좋고 귀한 선물입니다. 3월은 성 요셉 성월이자 은총과 회개의 사순시기입니다. 3월31일 부활 대축일까지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참 좋은 시간들입니다. 문득 어제 어느 노정치가에게 방송시 언뜻 들은 삼실(三實)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실(眞實), 절실(切實), 성실(誠實)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세말마디는 그분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려는 사람이라면 삼실의 삶에 이어 삼감(三感)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 삼망(三望)의 사람이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감사(感謝), 감동(感動), 감탄(感歎)의 삼감(三感)이라면, 절망(絶望), 원망(怨望), 실망(失望)이 삼망(三望)입니다. 참 감사하고 신기한 것은 제가 여기 요셉 수도원에 만36년 동안 정주하면서 막막하고 답답했을 때는 있었어도 결코 삼망(三望)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 믿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다면 삼망(三望)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막막하고 답답할 때 참 많이 바라봤던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이었습니다. 자주 되뇌었던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말마디였고, 이어 참 많이도 인용했던 “하늘과 산”이라는 제 자작 애송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무려 27년전 시이지만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늘이 평생 도반인 하느님을 상징한다면 산은 저를 상징합니다. 하늘과 산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과연 날로 신뢰와 사랑 깊어지는 하느님과의 관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 여기가 천국입니다.”

아름다운 수도원 경관에 부러워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불편하고 힘든 남남만도 못한 관계라면 거기가 연옥이요 지옥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공동체내에서 관계의 훈련,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에 공동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이란 물음만 있고 하느님이란 답이 없으면 평생 헤매게 됩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과의 관계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이사야 예언자이고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하느님은 아버지로 더 구체성을 띄게 됩니다. 3월 사순시기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해야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참된 영성의 표지가 겸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은 얼마나 좋은신 분인지요! 은총의 사순시기에 참 적절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의 참 아름다운 고백시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 주었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니 인공지능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영적 진보라기 보다는 인간 공동체 정신의 퇴행, 영성의 쇠퇴를 보여줍니다. <녹색평론 185호 2024년 봄호>의 특집은 “인류는 인공지능 시대를 건너갈 수 있을까”였습니다. 인공지능이 추세라 하지만 저에게는 “판도라의 열린 상자”처럼 웬지 인류의 미래가 불길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시를 쓰려면 하느님의 예언자이자 시인인 이사야처럼 이런 희망과 생명, 빛이 넘치는 구원의 시를 써야 할 것입니다. 평생 도반이자 평생 착한목자이신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있는 참사람의 원형 이사야 예언자요, 예언자의 다음 하느님 사랑의 고백은 절정(絶頂)이자 절창(絶唱)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못박듯한 하느님의 고백은 얼마나 절절한지요! 바로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도록 깊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지칭하는데 어머니를 능가하는 “사랑의 어머니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로 비견되는 하느님에 이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주저함없이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깊이할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원대한 평생목표가 하나 있다면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하느님을 날로 닮아감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백을 과감히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주신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이 바로 그때, 구원의 때입니다. 모든 말씀에 앞서 반드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마디가 강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독보적인 관계의 깊이를 지닌 아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가까워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3월 성 요셉 성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양부로서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父性)과 하느님 어머니의 모성(母性)을, 양성(兩性)을 겸비한 참으로 온전한 요셉 성인처럼 생각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기르시는 아버지시오,

 정결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께 간절히 청하오니,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저희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또한 죽을 때에 저희를 지켜 주소서.” -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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