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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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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21 조회수237 추천수5 반대(0) 신고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나해] 요한 10,11-18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얼마 전, 면직된 전 신부가 이끄는 기도 공동체의 실상이 방송을 통해 폭로되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공동체를 이끄는 면직 신부는 성모님이 자신의 꿈에 나타나 계시를 내려준다고 주장하며 여러가지 지시와 명령들로 신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통제했는데, 그 내용들은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 면직 신부를 철저히 믿는 신도들은 한눈에 봐도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그 무리한 요구들을 ‘구원의 진리’로 여기며 철저하게 따랐지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자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10년 이상 그 공동체에 몸담으면서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다 보고하고 허락을 구했던 그녀가, 병원치료를 당장 중단하고 기도의 힘으로 암을 극복하라는 면직 신부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가 암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또한 많은 신도들이 면직 신부의 종용에 따라 집과 현금 등의 재산을 전부 그 공동체에 봉헌하기도 했습니다. 가족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고 말이지요. 이 모든 일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목소리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악마의 속삭임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해 생긴 일입니다.

 

오늘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묵상하는 성소주일입니다. 그 부르심은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가지 목소리와 방식을 통해 주어지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유혹의 ‘소음’들이 가득하기에 주님의 부르심을 제대로 알아듣고 응답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판단과 식별의 기준입니다. 내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나를 파멸로 이끄는 ‘삯꾼’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목자’ 주님의 목소리인지 헷갈린다면 그 목소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삯꾼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며 이해타산을 내세우고, 자기가 더 큰 이익을 얻을 길, 자기가 더 큰 명예와 권력을 누릴 길을 찾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흑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달콤한 감언이설로 우리를 유혹하지요. 자기를 따르면 고생 없이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거나, 자기를 따르기만 하면 일확천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꼼꼼히 따져보면 궁극적으로 나에게 이로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철저히 그의 배만 불려주게 될 뿐입니다. 그런 그의 진의를 모른 채 욕망에 사로잡혀 무턱대고 그의 말을 따랐다가는 나도 삯꾼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 영광을 쫓는 사람, 주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더 소중히 여기며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다고 하지요. 우리를 참된 행복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목소리가 그렇습니다. 당장은 그 말씀이 듣기 불편하고 따르기 싫습니다. 그대로 따랐다가는 큰 손해를 보거나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만 같아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양들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양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양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목숨까지도 바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양들은 그가 하는 말이라면 주저하거나 고민할 필요 없이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지요. 착한 목자이신 주님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한 번 사랑하신 이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당신 자신보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시고 챙기시는 분입니다. 그런 그분의 사랑을 신뢰한다면 당장 듣기 거북하고 따르기 힘들다고 해서 주님 말씀을 함부로 흘려버리지 않습니다. 입에 쓴 약이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듯, 듣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그 말씀이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열심히 따라가다보면 거기에 내가 살 길이, 참된 행복이 있을거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식별하고 따르게 도와주는 그 믿음과 희망을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에 지닐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그 방법을 ‘앎’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십니다. 착한 목자와 그분의 양은 서로를 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함께’ 있으면서 경험을 통해 상대방의 세세한 점까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나를, 내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마음과 뜻을 깊이 헤아리면서 알게 된 살아있는 ‘앎’이, 주님과 거리를 두고 머리로만 그분의 뜻을 추측하는 죽은 ‘앎’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참된 목자이신 주님은 당신이 사랑으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랑으로 당신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과 우리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며, 그 앎을 통해 더 깊은 친교 더 완전한 일치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주님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받는 그분의 참된 양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방법을 하느님을 위한 희생과 봉헌으로 설명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분 뜻에 순명하기 위해 기꺼이 당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으시며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드님이 당신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봉헌한 그 생명을 다시 돌려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먼저 보여드려야 그분께서 그 대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해야만 조건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능력이나 자격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먼저, 차별 없이, 한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지요. 다만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분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편에서 그럴만한 준비를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준비로 하느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희생과 봉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희생하는 것이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며, 그 사랑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따르는 그분의 참된 양떼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사실을 되새기는 것이 오늘 성소주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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