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을 주님께서 제게 하셔도 저는 베드로와 똑같은 답을 할 것입니다.
정답을 얘기한다면 그렇게 답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정답이 아니라 주관적인 답을 듣기 원하신다면,
다시 말해서 주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어떤 분이라고 답할지 오늘 저는 생각게 되었습니다.
보통 하느님을 얘기할 때
심판자이신 하느님과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얘기하는데,
이 가운데서 저에게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어제는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사무엘기의 말씀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고 끌어올리기도 하시나이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시나이다.”
그런데 왜 이 말씀에 가슴이 찔렸을까요?
그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게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신데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제가 너무 쉽게 또는 편하게 생각하여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제게 너무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냐오냐하니까 할애비 수염까지 끄댕긴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렇게 자애로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버릇이 없는 놈일 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낭비하는 못된 놈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 생각에 버릇없는 것도 문제지만
사랑과 자비를 낭비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낭비는 남용이고 선용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그 엄청난 사랑과 자비가 더 이상 사랑과 자비가 아니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눈물 나도록 고맙고 소중해야 내게 사랑이고 은총이지
하나도 고맙지 않고 당연하여 물 쓰듯 낭비하면
그것은 물이지 더 이상 은총과 사랑이 아니지요.
며칠 전에 한 분을 면담했습니다.
수도원을 몇 군데나 들락날락한 분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몇 번이나 한 분이고 은인도 몇 분을 만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도원을 몇 번 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때마다
하느님 체험을 했고 하느님이 보내주신 은인을 만났던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은인이 되어달라고 청하러 오신 것인데
제가 그분을 도와드리면 제가 그때는 은인이 되겠지만
그분은 이내 수도원을 나올 것이고 배은망덕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도 저도 들어갈 때만 은인이지
수도원을 나올 때는 은인이 아니게 됩니다.
은총과 사랑은 소중히 여길 때 은총과 사랑이지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낭비하고 남용하면 더 이상 은총도 사랑도 아닙니다.
생명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이 생명을 주실 때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하느님 생명을 살지
소중히 여기지 않고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그 자체로 죽게 되겠지요.
생사를 쥐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주실 수 있는 분이지만
하느님께서 벌로서 죽음을 주지 않으셔도
사랑으로 주시는 생명을 내가 살지 않아서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내게 어떤 분입니까?
생명의 하느님입니까?
사랑의 하느님입니까?
구원의 하느님입니까?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까?
제자들처럼 이렇게 질문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