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5,21.23)
오늘의 복음을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익히 잘 아시는 작가 ’코엘료‘의 유명한 소설「연금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코엘료가 책의 맨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에 썼듯이, 코엘료도 자신의 젊은 시절 연금술에 관한 오랜 연구와 방황을 통해 깨달은 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늙은 왕이 산티아고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인이 행복의 비밀을 알아 오라며 자기 아들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에게 보냈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사십일 동안 사막을 걸어가 산꼭대기에 있는 아름다운 성에 이르렀지요. 그곳에 현자가 사는 집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말을 들은 현자는 우선 자신의 아름다운 집을 모두 구경하고 오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동안 기름이 담겨진 찻숟갈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집안을 모두 둘러보았는데, 오직 찻숟갈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아무것도 보질 못했지요. 그러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다시 가서 집안의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살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는 이번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지만, 그 사이에 숟가락의 기름이 흘러 없어져 버렸지요. 현자 중의 현자인 그 사람은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요.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도 잊지 않는데 있도다.’ 』 라고.
이것은 코엘료가 연금술이란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결이며, 그것은 곧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경험해 보는 것이며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 곧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도 잊지 않는 것에 있다, 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법을 그는 <작가의 말>에 자기 스승인 ‘람’이 들려준 이야기로 써놓았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어느 수도원을 찾았을 때, 사제들은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성화를 그려 보이기도 하며 경배를 드렸다지요. 그런데 그중 맨 끝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한 볼품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배운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그가 경배드리는 것을 막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마음을 바치고 싶어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지요. 그러자 아기 예수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고, 성모께서는 오직 그 사람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겁니다. 』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자기 신화를 사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산티아고가 보여 준 것과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산티아고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할, 매 순간에 자신의 신화를 살기 위해서 안락함을 버리고 고난을 택하는 용기를 가졌지요. 그런데 바로 그 고난이 곧 납을 녹여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의 용광로가 된 것입니다. “연금술의 작업 과정은 물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신의 변화를 나타낸다.” ( C.융)
연금술은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바는 하늘나라는 선물이요 과제라는 것, 그리고 은총이요 요청이기에, 곧 현재와 임박할 종말 사이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마지막 날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의 능력에 따라 나눠 준 액수가 당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5 탈렌트는 30,000 데나리온, 2 탈렌트는 12,000데나리온 그리고 1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 정도인데, 당시에 농촌 일꾼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엄청난 거금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 종은 주인이 맡긴 돈을 활용하여 큰돈을 벌어들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능력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신의에 대한 응답이며 성실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셋째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돈을 다만 안전하게 보관만 합니다. 이는 곧 자신과 자기 능력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었습니다. 아무튼 때가 되어 돌아온 주인은 종들을 불러 셈을 했고, 그에 따라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5,21. 23) 여기서 주인은 두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한 까닭은 두 종이 벌어들인 돈의 많고 적음 보다 종들의 자신(=주인)에게 대한 신의와 성실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은 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기보다 주인에 대한 됨됨이를 판단하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시는 모지신 분(마태25,24)이라고 생각해서 그릇되게 주인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결국 주인은 맡긴 돈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한 셋째 종에게서 빼앗은 돈을 첫째 종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써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29)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지칭하는 경제용어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타인과 비교하고 남을 시기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더욱더 초라해진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고 봅니다. 뒤늦게 후회한다 해도 때는 그땐 이미 늦을 것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25,30) “주님, 저희에게 지금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또한 저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여주시고, 이 모든 일을 성실히 끝내고서는 자만하고 자랑하기보다,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