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3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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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9-08 | 조회수90 | 추천수6 | 반대(1) 신고 |
[연중 제23주일 나해] 마르 7,31-37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기본조건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들이 참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을 닫아걸은 채 제대로 소통하려고 하지 않기에,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친교를 나누지 못하고 서로가 단절된 채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귀머거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려는 바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고집과 편견으로 스스로 내 귀를 막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일에만 지나치게 열중하느라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흘려 버립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내 얘기만 하기에 하느님께서 이웃을 통해 하시는 말씀도 듣지 못합니다. 자신이 인정하는 것 만 들으려 하고, 의심스러운 것에는 귀를 닫습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형제 자매의 간절한 외침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의 말을 가로막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의 입이 막혀 버렸습니다. 나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나의 내밀한 진실을 이웃이나 하느님 앞에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입을 닫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많은 말 뒤에 숨기고 경건한 말 속에 감추어 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으며 내 안에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있는지를 아무도 모르게 합니다.
이처럼 참된 소통을 하지 못하고 닫힌 채 살아가는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다섯 단계에 걸쳐 치유하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제대로 듣고 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불러 내십니다. 일상의 시끄러운 소음에서, 늘 우리 주변에서 함께 일하던 많은 사람 가운데서 우리를 따로 불러내시어, 당신 곁에 머물게 하십니다. ‘따로 데리고 나가다’라고 번역된 부분은 그리스어로 ‘카트 이디안'인데, 이는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가다’ 혹은 ‘당신 가족으로 삼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집으로, 당신이 하느님과 만나 대화를 나누시는 그 ‘외딴 곳’으로 초대하시어 우리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치유의 첫 단계는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을 귀 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 속에 넣으시는 일입니다. 그분은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상처 난 자리에 넣으심으로써 우리의 아픈 부위가 어디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두 귀를 막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들어야 할 중요한 것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지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있으면 마치 깊은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세상과는 단절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내 몸 안에서 나는 소리, 즉 숨쉬는 소리, 심장 뛰는 소리 같은 것들이 아주 크게 들립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깊이 들어간 나의 내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바깥을 향하게 하는 나의 두 귀를 막음으로써 외부의 소리 대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대고 나지막히 속삭이시는 목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경청의 시작이며 그렇게 할 때 나의 이웃 형제 자매들을 통해 들려오는 외부의 소리에서도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뜻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치유의 두번째 단계는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에 침을 발라 말 못하는 이의 혀에 대시는 행동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상대방에게 불쾌함을 유발하는 불결한 행동처럼 여겨지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상처 입은 자녀에게 약을 발라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제대로 듣지 못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에게 다가가 위로해 주시려는 겁니다. 그가 오해로 주눅든 마음을 풀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말들을 하나씩 꺼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행동을 그리스어 원문에 가깝게 해석하면 사뭇 다른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으셨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를 붙잡으셨다.” 즉 이 문장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제대로 말하는 법을 익힐 때까지 말을 멈추게 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자주 많은 말들 속에 자신을 감추려고 듭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도록 많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말을 한들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지요. 그렇기에 우리에겐 침묵이 필요합니다. 침묵은 자기 내면을 그리고 하느님을 대면하게 합니다. 그런데 참된 침묵을 위해서는 우리의 혀만 붙들 게 아니라 우리의 이성도 다스려야 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의 이성은 쉬지 않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머릿 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생각들, 즉 걱정 근심 고민 계획 후회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정말로 집중하며 머물러야 할 참된 가치들에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습니다.
치유의 세 번째 단계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땅에서 세상에서 하늘로 돌리시기 위함입니다. 시선이 세상에만 묶여 있으면 세상살이가 주는 걱정과 근심들 때문에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혼란스럽지요.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통한 기도, 묵상, 침묵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그분 뜻을 헤아리면 복잡하고 심란했던 모든 것이 단순하고 분명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될 것이고, 아량도 넓어질 것이며,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남들 눈치를 보며 주눅들 일도, 이런저런 근심 걱정 속에서 괴로워 할 일도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심으로써 우리가 말하고 듣는 모든 것이 결국 하느님을 향하고 있으며 또 향해야 함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말에서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 상황 속에서, 여러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들을 수 있고 올바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의 네 번째 단계로 예수님께서는 한숨을 내쉬십니다. ‘한숨을 쉬다’라고 번역된 부분을 직역하면 ‘예수님께서 소리를 내며 신음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픈 이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이시는 예수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싸우십니다. 내가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내가 자아와 편견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와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싸우십니다. 그분은 내 병든 마음과 싸우시고, 말못하는 나의 입과 싸우시며, 듣지 못하는 나의 귀와 싸우시어 나의 모든 감각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픔을 당신 아픔처럼 나의 슬픔을 당신 슬픔처럼 함께 느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감과 연민이 가득한 자비의 주님, 나를 위해 온 힘을 다하시는 사랑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세상의 어두운 골짜기를 걷는다 해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갈 수 있는 겁니다.
치유를 마무리 하시는 단계로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귀먹고 말 더듬는 우리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안과 걱정에서 비롯되는 두려움과 집착이라는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하게 하십니다. 곧 우리가 말을 통해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 형제 자매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고, 사랑과 배려가 가득 담긴 참된 소통으로 깊은 친교를 맺게 하시며, 마침내 참된 일치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제대로 듣고 말함으로써 오해와 갈등으로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기 위해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 문을 열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입과 귀의 상처는 주님께서 언제든지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건 나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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