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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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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9-22 조회수127 추천수4 반대(0) 신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이동] 루카 9,23-26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박해가 한창이던 때에 천주교를 믿는다고 여인이 끌려오니 관장이 “너는 왜 왔느냐?”하고 모욕적으로 묻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대답합니다. “저 또한 천주님을 믿는 사람이니 국법대로 다스림을 받으러 왔습니다.” 관장이 언짢은 목소리로 묻습니다. “네가 믿는 천주가 도대체 어느 책에 적혀 있느냐?” 여인은 대답합니다. “저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관장은 글도 모르는 게 와서 국법 운운하니까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는 “글도 모르는 게 뭘 안다고 천주를 믿느냐, 너는 천주를 본 적이 있느냐?”하며 다그칩니다. 그러자 여인은 “저는 본 적이 없습 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봐라! 글로 아는 게 있느냐,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뭘 가지고 믿는다고 큰 소리를 치느냐?”하고 관장이 무시하자 여인이 답합니다. “나리, 제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말아야 할 것으로 말한다면 저는 이 나라의 임금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나리님을 보내셔서 오셨기에 저는 임금님이 계신 줄 믿나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있는 걸 보고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을 어찌 믿지 않겠나이까!”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온갖 거짓 정보들이 가득하여 무엇이 진실인지를 제대로 구별해내기 어렵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유혹거리들이 넘쳐나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걷기가 어려워진 요즘 세상에서, 순교 성인들의 모범적인 신앙을 되새기는 것은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식별하는데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하느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신앙의 길을 계속 걸어나갈 용기와 힘을 얻지요. 순교 성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박해를 각오해야 했고 재산과 땅, 명예와 성공, 그밖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 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얻고자’ 했으며 주님과 고난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랬기에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굳게 믿었기에, 그들에게는 그 신앙이 전부였기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처럼 신앙을 내 삶을 멋져보이게 꾸며주는 ‘악세서리’정도로 생각했다면, 시간이 남고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여가활동 정도로 여겼다면, 순교는 엄두도 못냈겠지요. 자연스럽게 ‘구원’도 나와는 먼 ‘남의 일’이 되었을테구요.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생활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그치십니다. 당신을 제대로 믿고 따르려면, 그래서 세상 종말의 날에 당신 뒤를 따라 천국에 들어가려면 대충대충, 눈치보며 적당히 할 생각말고 최선을 다해 구원의 길을 걸으라는 겁니다. 그 과정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데, 먼저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쓸모 없는 것을 버리는게 아니라, 주님과 그분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존에 내가 중요하게 여기며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비워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중요할 지 모르지만 구원에는 별 도움이 안되는 그것들이 내 마음 안에 가득 차 있어 주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만 하려고 드는 나의 취향, 바람, 계획 등 자기 중심적인 요소들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주님과 그분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채워가라는 뜻입니다. 이는 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입니다. 여름에 감나무가 덜 익은 열매들을 털어내듯이, 가을에 활엽수들이 그 많던 나뭇잎들을 떨구듯이…. 셋째,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들을 하느님께,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바치라는 뜻입니다. 물론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그러하듯 하느님께 딱히 내어드릴 것은 없고 받기만 하는게 어쩔 수 없는 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이지만, 그래도 사랑과 정성 그리고 희생을 바치려는 마음을 갖는게 중요한 겁니다.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가 신부님께 드릴 것이 없어 감자라도 쪄 드리는 그 마음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한 두 번하고 마는게 아니라 꾸준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꾸준함을 ‘날마다’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나의 작은 노력이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는 큰 변화로 나타나지 않아 실망스러워도, 매일매일 ‘제 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아 답답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내가 어제보다 더 나은 나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나선형 계단’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제 자리를 도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주님께 가까워지는 신앙의 여정을 이렇게도 표현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예수님의 일부라도 닮으려고 애써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 뒤에 설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의 겸손을 닮으려고 애써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나의 욕심과 집착들을 비워 나가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날마다 조금씩 신앙을 실천해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양보하고 희생하는 연습을 해야지요.]

 

매일 이루어지는 그 노력은 십자가를 지는 행동으로 구체화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생활에 동반되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쉽고 편한 길을 놔두고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려고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길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쓸 데 없는 고생을 사서하는 비효율적, 비합리적인 생활양식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걷다보면 중간에 높은 산도 만나고 깊은 강도 만나게 되는데, 그걸 넘고 건너는게 힘들다고 천국으로 가는 걸 포기할 수는 없으니 힘을 내어 ‘정면돌파’를 선택하는 겁니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점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 어깨에 짊어진 크고 무거운 짐을 힘겹게 질질 끌고 가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듯,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어안고 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때로는 나를 아프게 찌를지라도, 때로는 그것 때문에 손해를 입고 희생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사랑과 순명으로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 성인들이 그렇게 하셨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과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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