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루카 13, 1 - 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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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10-25 | 조회수8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13,9)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한 치 앞,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내일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1994년 10월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 탄신 3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은인들을 모시고 이태리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그 일행 중에는 청주 미평과 일본 예수고난회 관상 수녀님 8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94년 10월 21일 오후, 저희 일행이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거의 다 마칠 무렵 관광 가이드로부터 <한국에서 성수대교가 끊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는 소식을 듣고 다들 비탄과 걱정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일행이 동시에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하면서 가족과 친지들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느라 난리가 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런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건이 단지 성수대교 사고뿐입니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대구 지하철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특별히 세월호 침몰 때, 성남시 테크노밸리 환풍구 붕괴 참사로 무고한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된 비극이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고로 돌아가신 그분들이 저희보다 큰 죄를 지었기에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그런 끔찍하고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어느 누가 멀쩡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리라고, 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하리라고, 튼튼해 보이는 큰 배가 침몰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분들 또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질 것이라고, 지하철에서 화재가 일어날 것이라고 또한 배가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무도 그 시간 그 자리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변을 당한 분들도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하리란 사실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살아 있는 우리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하고 비복음적인 개신교 목사들이 설교 가운데 자신들 교회에 소속한 신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죽어간 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변을 당한 것이라 설교하는데, 저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며 하느님의 심판도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런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그리고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13,2~3.4~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교는 바로 무화과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 포도원 주인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감한다면 예수님께서 이토록 강력하게 말씀하신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13,6.7) 물론 무화과나무 주인은 언제든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주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운명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흥정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채 자신이 마치 주인인 양 행세하며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만일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다면 언제라도 포도원 주인이 자신을 잘라 버릴 수 있음을 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망각하고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에 회개하지 않고 회개를 미루는 까닭은 ‘지금 영세를 받으면 족쇄를 찬 것과 같으니 좀 더 나이 들어서!’라고 다음으로 미루고 또 미루고자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떤 면에서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루다 보면 영원히 그 기회를 놓치고 말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13,9)라는 경고의 말씀처럼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한 채 잘려 나간 가치처럼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다리시고 참아 주시지만, 그 시간이 넘으면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끔찍한 사건 사고에 관한 뉴스는 삶이란 길고도 길지만, 때론 한 치 앞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신앙인은 물론 많은 이들이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던 사실은, 죽음이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준다, 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타인의 재난이나 사건 사고를 접한 우리가 배우고 살아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어떤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내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참된 자신을 찾고 참된 자신으로 한정된 삶의 시간 속에서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에33,11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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