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지옥이 없다는 헛된 희망을 주는 이들에게> 복음: 마태오 25,31-46 
LORENZETTI, Pietro 작,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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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짐승의 사랑의 수준이 있고, 인간, 그리고 성인들의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도 구제받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이와 달리 엄격한 심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지만,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해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이며,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하느님께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내가 먼저 구원받아 그 사랑의 기쁨과 능력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이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말씀하십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는 매우 탐욕스럽고 냉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과 직원들을 경멸했습니다. 어느 성탄 전날 밤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들을 만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그 이전까지 그는 절대 다른 이를 돕거나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내면의 구원을 받은 이후에야 비로소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고 아기가 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의 눈높이에서 아이를 끌어올립니다. 그러나 만약 아기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들고 그 물속에는 괴물들이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죽을 것이 뻔한데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게 사랑일까요? 부모는 또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게 함께 죽는 것이라고 믿고 뛰어들어 죽으면 그 부모를 통해 새로 태어날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는 생명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생명에 대한 경시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은 낚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깊이에 있는 물고기들은 낚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두운 심해로 들어가서 눈을 잃은 물고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 물고기를 낚겠다고 그 압력 높은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시입니다. 반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어릴 적부터 가진 열등감과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증오와 야망으로 자신을 채웠습니다. 작은 악들이 쌓여 마침내 그는 유대인을 향한 끔찍한 학살과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최악의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결국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고, 최후의 순간에도 회개하지 않은 채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반지의 제왕』의 골룸은 우연히 절대 반지를 얻은 이후부터 탐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 전체를 그 반지에 투자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반지를 얻으려는 집착만이 남아 삶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저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해 몇 년간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저에게 다가오기 어려워집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더는 희망을 할 수 없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다른 죄는 용서받아도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비행기의 비상 상황에서 산소마스크를 먼저 착용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 안전하고 구원받은 상태에 있어야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서 반드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야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옥이 존재하고 심판이 존재합니다. 사랑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모기나 기생충은 사랑을 배울 수 없는 수준입니다. 희망이 없는 것에 희망을 거는 것은 나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경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받아서 주는 것이라 그 받은 사랑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하느님이 계셔야 사랑이라고 말하며 하느님 생명까지 경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심판이 없는 게 사랑이 없는 것이지, 사랑이 있다면 심판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서도 일부러 죄를 짓는다면,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제물이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판, 그리고 적대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에 대한 무서운 예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히브 10,2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