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양승국 신부님_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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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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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14 | 조회수55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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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런 말씀의 배경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신앙 행위는 다분히 문제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과 삶의 불일치, 그들이 열렬히 바쳤던 기도와 구체적인 현실과의 유리, 철저한 위선과 교만, 그리고 죄책감 하나 없이 되풀이하던 거짓 맹세가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지키지 못할 맹세 아예 하지 말고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마라고 당부하셨지만, 우리 삶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맹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약속 혹은 계획이 필요합니다. 서품식 때 사제 서약이 그렇고, 수도자들 서원 예식이 그렇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어느 여름, 돈보스코는 과로로 쓰러집니다. 검진을 한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로 위중했습니다. 아이들은 돌아가며 릴래이 밤샘 기도를 바쳤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빵과 물로 연명하며 돈보스코의 고통에 함께 했습니다. 아이들의 기도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돈보스코는 기적적으로 병석을 털고 일어났습니다. 아직 정상이 아니라 더 요양이 필요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던 그는 지팡이를 짚고 오라토리오로 들어왔습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그 모습을 확인한 아이들은 다들 초스피드로 돈보스코에게 달려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어서 큰 아이들이 돈보스코를 무등태워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어린 친구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돈보스코 만세를 외쳤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역동적이고 상호적인 것 같습니다. 돈보스코가 아이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니, 그 사랑을 받은 아이들도 그를 향해 받은 사랑을 되돌려 줍니다. 또한 그런 아이들의 사랑을 확인한 돈보스코는 목숨까지 바쳐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 순간 나온 돈보스코 불멸의 어록입니다. “앞으로 나는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공부하며,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연 어떤 대상을 향해 삶의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조명연 신부님_2025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욕조에 넘어져 죽을 확률은 80만 1,923분의 1이라 합니다. 그리고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은 428만 9,651분의 1이라 합니다. 둘 다 아주 희박한 확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조에서 넘어져 죽기보다 10배 희박하고,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 2배 더 힘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로또 당첨이라고 합니다.
로또 당첨 확률이 814만 5,060분의 1이라고 하는데, 거의 제로에 가까운 확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또 당첨 명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기에는 현수막이 늘 붙어 있지요. ‘48번째 1등 당첨’, ‘로또 명당 1등 17번’ 등의 현수막을 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로또 명당 복권 판매점을 찾아서 전국을 쫓아다닌다고 합니다. 이런 열정으로 과연 제로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당첨되었을까요?
이런 열정은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열정으로 다른 일을 하면 더 높은 가치를 실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자기 열정을 쓸데없는 곳에 쏟아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의 열정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재미있는 실험이 생각납니다.
2개의 주머니가 있습니다. 하나에는 현금 5억 원이 담겨 있고, 다른 하나는 매년 5천만 원을 벌 수 있는 역량 주머니라고 합니다. 과연 사람들은 어떤 주머니를 선택할까요? 대부분 5억 원을 선택했습니다. 한 번에 쉽게 그리고 편하게 세상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쓸데없는 곳에 우리의 소중한 열정을 쏟게 합니다.
편하고 쉽게 자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거짓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또 지금의 위기를 쉽게 모면하기 위해 헛된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숨깁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도 그런 위선을 숨길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또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기 열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순간의 만족을 위한 열정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위한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소문은 현명한 자에 이르러 멈춘다(순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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