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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우진 | 작성일2001-04-19 | 조회수1,678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오랫동안의 여행을 끝내고 나의 자리에 돌아와 있다.
교회 안에서 부활시기라고 하는 ’신비의 시기"를 많은 형제들이 살고 있는 양성 공동체(광주, 대전)에 머물러 있었다. 참으로 은혜롭고, 따듯한 분위기를 맛보았다.
그러면서 "과연 양성이라는 것, 교육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교육은 교육자가 자신이 경험했던 바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미명하게 과도한 주입이 이루어졌던 것이라고 선뜻 기억하게 된다.
그렇기에 만일 교육자가 자신 안에 많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피교육자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것으로 부터 예외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사실 그때는 몰랐다. 나 역시 그림자가 많은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그림자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던 이들이 지금은 학부모나 교육자가 되어 현재의 교육자들에게, 피교육자들에게 자신들이 받았던 상처에 대한 복수내지는 투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그런 상태는 우리에게 부활의 진정한 기쁨을 왜곡된 이미지로 전달하기가 쉬울 것같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은 개인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신다
제자들의 처지에 맞게 당신의 부활을 증거하시는 모습은 오늘날 교육과 양성이라는 상황 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것같다.
그들이 평화롭기를 비는 모습, 그들이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자 천천히 당신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설명하시는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과 식사를 통해 친교의 삶을 증거하시는 모습.
우리는 부활한 모습으로 피교육자를, 피 양성자를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들을 부활을 갈구하는이들의 모습으로 바라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부활이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부활 시기이게 기뻐해야한다는 당위의 문제,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체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을 부활한 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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